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불교와 용의 힘을 빌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염원을 담은 수중릉

카테고리 없음

by 마패여행 2009. 1. 12. 17:11

본문

728x90

동해안 7번국도를 경주구간을 달리다보면 양북면 봉길리 동해바다 한가운데 갈매기들이 호위하듯 춤추는 곳에 푸른 바다

위에 우뚝선 바위섬을 만나게 된다.

이곳이 흔히 대왕암이라 불리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수중릉으로 국가 사적 제 158호로 지정된 신라 제 30대 왕이었던 문무

대왕릉 (文武大王陵)이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뒤를 이어 삼국시대를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발해와 신라 양국시대를 만드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왕이다.

외세의 힘을 빌어 동족을 멸망시킨 신라는 당나라의 들러기가 되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만주벌판을 포함한 대부분의

 땅을 뺏기고 동해안과 남해안은 몰려오는 왜구들로 인해 백성들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81년 7월에 왕<王>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불식<佛式>으로 화장<火葬>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이 죽어서도 동해

<東海>의 용<龍>이 되어 왜구<倭寇>를 막겠다는 유지를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王>이 용<龍>이 되었다고 생각하였

으며 그 대석<大石>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외세의 힘을 빌어 민족을 반쪽낸 신라가 그이후 왜적의 침입을 받으면서 용의 힘을 빌려야 할정도로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려

 결국에는 후백제 견훤의 말발굽아래 유린당하고 고려에 투항하기까지하는 단초가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장면

이 아닌가 싶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水路>로 들어오고 서쪽 수로<水路>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

 모양의 화강암석으로 수면<水面>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

대왕<文武大王>의 유골<遺骨>을 봉안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왕암에서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사방에 수로<水路>를 설치한 것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舍利塔>

의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즉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탑<印度塔>의 경우나 백제의 미륵사탑<彌勒寺塔> 하부에

 4방으로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이 대왕암에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대왕암은 가까이 있는 이견대(利見臺), 감은사(感恩寺)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으며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곳이다.

이런 형태의 능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한편 이 곳은 능이 아니라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곳[散骨處]이라는 견해도 있다.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인근 해변에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神文王>이 이곳에서 대왕암<大王岩>을 망배

<望拜>한 곳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번지에 있는 국가사적 사적 제159호로 지정된  이견대는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感恩寺(감은사)를 完成(완성)한 神文王(신문왕)이 이곳에서 바다의 큰 龍(용)이 된 文武王(문무왕)과 하늘의 神(신)이 된

 金庾信(김유신)이 龍(용)을 시켜 보낸 검은 玉帶(옥대)와 대나무를 얻게 되었다.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月城(월성)의

天尊庫(천존고)에 保管(보관)하고, 적병이 쳐들어 오거나 炳(병)이 돌거나 가뭄 등 나라에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 이를

 불어 모든 어려움을 가라앉게 한 萬波息笛(만파식적)의 傳說(전설)이 바로 여기서 由來(유래)한 것이다.

利見臺(이견대)라는 것은 中國(중국)의 周易(주역) 가운데 "飛龍在天(비용재천) 利見臺人(이견대인)" 이란 글귀에서 취한

것으로 즉 神文王(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龍(용)을 통하여 크게 이익을 얻었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문왕은 부왕인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문무왕이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감은사를 창건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신문왕이 이어 완성 하였는데, 금당(金堂) 아래

에 용이 들어 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다는 기사가 전한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誌)에 의하면, 어느 왕 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 위에 건물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견대지

(利見臺址)에 관하여는 현재 누정건물이 있는 장소라는 설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 왔다. 1968년 그 곳을 시굴한 바 몇 기의

초석자리 비슷한 적심부가 나타났으나, 신라시대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이견대지로 확정짓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 조선시대문헌에는 이견대지가 이견원(利見院) 옆에 있다는 기사가 있으

므로 현 누정이 있는 자리는 조선시대의 이견원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현재 누정이 있는 위치

의 뒤 언덕 위에서 신라시대 와편이 출토되는 것을 근거로 이곳이 원래의 이견대지라는 견해도 있다.


만파식적은 대왕암과 함께 외세의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가 그자신도 국난과 외세의 침입에 힘들어 했음

을 알게 해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만파식적은 죽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의 한 아들인 김유신공이 신라를 지킬 보물로 내려준 것이며 동해안에

 있는 조그만 산에 심어져 있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로 동해의 바다용이 직접 당시 신라왕인 신문왕에게 바친 신기한

 피리로 전한다.


대왕암이 있는 봉길해변에는 수중릉에 얽힌 전설을 믿는 무속인들과 소원성취를 빌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고 해변 여기저기에 그흔적들이 남아 있다.



 

[관련자료]

http://culture.gyeongju.go.kr/

http://www.cha.go.kr/


[경주맛집]

<금성관> 대게장순두부

         경북 경주시 동천동 931-1 / 054-745-4371


<현대밀면> 밀면, 비빔밀면

            경북 경주시 서부동 232번지 / 054-771-6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