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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전남 구례 지리산 국보제67호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전라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7. 6. 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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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전남 구례 지리산 국보제67호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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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覺皇殿)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지리산의 억센 맥을 누그러뜨리려 세웠다는 말이 전해지는 곳으로 국보 6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부처님의 몸을 가리켜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해서 본래 장육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만한 금색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장육전은 임진왜란때 불타버려 당시의 모습이나 불상은 찾아 볼수가 없다. 본래 이 건물은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의상대사가 3층, 사면 7칸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소실된후 30년만인 1636년(조선 인조 14년) 벽암선사에 의해 화엄사는 복구되었으나 각황전만은 복구되지 못하다 1699년(조선 숙종 25년) 계파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정면 7칸 (26.8m), 측면 5칸 (18.3m), 높이 15m로 내부 전체가 한칸의 방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안에 세워져 있는 기둥 하나 하나는 한그루의 나무로만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고 천장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주변이 경사지게 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 그 예가 드물다고 한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http://www.gurye.go.kr/culture/tour_famous/culture_f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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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는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연기(緣起)조사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자장(慈藏)율사에 의해 증축되었던 대가람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벽암(碧巖)선사가 1606년부터 재건하여 지금과 같은 큰 절이 되었다.
각황전은 1702년(숙종 28)에 계파대사(桂波大師)가 중건한 중층의 대불전(大佛殿)으로 전내에는 삼여래(三如來)·사보살(四菩薩)을 모시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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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은 통일신라시대에 건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석축 위에 조성된 대지에 주축선과 직각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구식으로 잘 짜여진 석조 기단 위에 선 웅장한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팔작지붕 다포집이다. 가구구조 형식은 기둥머리에 창방을 끼고 그 위에 평방을 돌리고 있으며 평방 위에는 기둥 위와 기둥사이에 공포를 올렸고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외이출목으로 되었다. 내부는 맨 위 천장까지 터 있는 통층으로 되었고 초층(初層)은 짧은 퇴보로 안쪽의 고주와 바깥쪽의 변주가 연결되었다. 천장은 고주를 끼워 우물 천장이 가설되었으나 그 주변이 굽어 경사지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적은 수법이다.
공포 양식은 외부첨차가 곡이 심한 쇠서(牛舌)로 시대가 떨어짐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체적인 느낌은 매우 복잡한 공포가 처마 밑에 꽉 차 아주 화려한 느낌을 준다. 또한 공포의 부재가 두툼하고 건실하여 안정된 감을 준다. 신라 때에는 건물내벽에 대리석으로 화엄경을 석각(石刻)하여 장치하였으나 그 후 불타버리고 현재는 건물 불단 밑에 그 파편이 따로 수장되고 있어 옛날 화엄학의 대도량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화엄사 사적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중건년대는 숙종25년(1699)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4년간에 걸쳐 완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각황전 본래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다. 중창 때 각황전 현판을 걸어 지금까지 각황전이라 부른다. 부처님의 몸을 일컬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장육전에는 석가여래의 모습 만한 장육의 금색불상을 봉안했을 것이고, 그 부처님은 지금의 좌불과는 달리 입불이었다고 생각된다.
전체적인 모습이 장중하고 안정되었으며 가구의 치목과 짜임이 우수한 건물이라 하겠다. 또한 규모의 면에 있어서도 여수 진남관에 버금가는 건물이다. 
 http://www.art.go.kr/vli_dir/vli_dir04_detail.jsp?ar_vvm_cd_seq=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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