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1일 공연취재] 무용극의 뉴웨이브, 춤으로 이룬 액션블록버스터 “왕의 춤”
네이버파워블로거인 지다님의 추천으로 무용극의 뉴웨이브,춤으로 이룬 액션블록버스터
“왕의 춤” 현장 취재가 진행됩니다.
네이버, 다음, 싸이월드, 티스토리에서 여행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들의 자발적인 모임인
여행블로거기자단은 공연취재에 참가 한후 온라인에서 블로그를 통해 관련정보를 제공하여 공연 문화
확산 및 관람객 다변화 와 유치극대화를 꾀하고 다양한 연계 상품의 발굴 및 연극 활성화에 일조 하고자 합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창립30주년기념 특별 기획공연인 무악극 <왕의 춤>은 조선왕조실록 의 ‘연산군일기’에 기록 된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이다.
술이불작(述而不作)의 지침을 따라 전통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힘’을 위력적으로 표현할 이번 <왕의 춤>은 춤으로 이룬 ‘액션블록
버스터’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전통 예술을 보다 호기심 가득한 설렘으로 접근하게 할것이다.
이 땅의 명무들이 펼치는 진중한 몸의 각본, 분명 우리 전통의 힘과 감동을 느끼는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l. 행사명: 춤으로 이룬 액션블록버스터 “왕의 춤” 취재
2. 장 소: 강남구 코우스(KOUS)
3. 일시: 2010년 3월 31일(수) 19시 30분
4. 블로거 참가 인원 : 10명
5. 취재진행 : 지다(김원섭: 010-3591-3616)
@ 참가신청자격 및 우선 순위
1. 여행블로거기자단 활동 및 블로그운영이 적극적인 회원
2. 단장이 취재 참가를 특별 초청한 사람
3. 여행블로거기자단 정회원 이상 회원중 활동 우수자 순서
@ 참가신청 마감일 : 3월 28일 (일요일) 13시
@ 일반진행경비는 참가자들이 각자 소요경비를 부담합니다.
@ 준비물 : 카메라와 간단한 필기도구
@ 참가자 할일 : 취재 참가후 일주일 이내에 자신이 운영하고있는 블로그와
여행블로거기자단카페에 후기 포스팅.
@ 취재를 처음 신청하시는 회원은 회원의 인적사항 확인을 위해 주소 및 주민번호를
카페지기에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카페지기 : 강경원(마패) faron@hanmail.net 010-5482-1325
@ 신청게시판 : 여행블로거 기자단 카페 http://cafe.daum.net/tourbloger
@ 스크랩 또는 복사용 주소
다음 : http://blog.daum.net/tourcodi/8126981
네이버 : http://blog.naver.com/faron/100102256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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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춤 보도자료
왕의 춤
2010. 3. 30(화) ~ 4. 3(토) 오후 8시, 오후 4시(토) 코우스(KOUS)
대본 연출 / 진옥섭, 안무 / 박영수, 연희감독 / 김운태, 음악감독 / 정영만
출연 : 진유림, 하용부, 박영수, 김운태 외
주최․주관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후원 : 문화재청
제작협력 : CID-UNESCO 한국본부, 제주민속촌, 신의상실, 고려국악사
2) 공연 개요
제목 : 무악극 <왕의 춤>
일시 : 2010. 03. 30 - 04. 03 (평일)pm8시, (토요일)pm4시
장소 : 코우스 (KOUS)
연출진 : 대본 연출_진옥섭 / 안무_박영수 / 연희감독_김운태 / 음악감독_정영만
출연진 : 진유림, 하용부, 박영수, 김운태, 양호성, 이동헌, 박종훈, 이계영, 김현미, 황주영, 김윤희, 오유정, 송해인, 장보미, 박태건, 기종석, 주영롱, 하민경, 김지훈, 강혁준, 김혜안
연주자 : 꽹과리_박종훈 / 장고_배지원 / 구음_정영만 / 피리_정석진 김현순 / 대금_정관윤 / 아쟁_조성재 / 가야금_서은숙 / 해금_정은주
주최․주관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후원 : 문화재청
제작협력 : CID-UNESCO 한국본부, 제주민속촌, 신의상실, 고려국악사
2. <왕의 춤>의 모든 것
1) <왕의 춤>의 여정
2008년 ‘처용굿’
‘처용굿’은 <왕의 춤>의 초연작으로 문화예술위원회의 무대예술양식화지원사업으로 호암아트홀에서 출발하였으며 굿의 형식을 갖춘 가․무․악, 곧 탈춤과 풍물 등 연희 전통을 잘 습합하여 1시간 30분의 대작으로 올려졌다.
2009년 ‘왕의 춤’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여 전석 매진의 기록을 세우며 큰 호평을 받기도 했던 <왕의 춤>은 사극의 범주에 있었던 연산사화를 연희극으로 차용하여 궁중연희와 민간연희를 잘 엮은 작품이다.
2010년 ‘왕의 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창립 30주년 특별 기획공연으로 코우스에서 발표 될 예정이다. 연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시선, 고독과 불안 광기 등을 잘 포함하여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품 자체의 특색 있는 볼거리를 무기삼아 10년, 20년 이상 롱런하는 ‘대한민국대표전통공연’이라는 비전과 함께, 나아가 <왕의 춤>이 가지고 있는 ‘무악극(=non verbal)’이라는 타이틀은 세계시장에 진출하는데도 큰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대사가 거의 없고 오로지 춤과 음악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특별한 배경지식 없이도 감상이 가능하다는 점, 이 점이 다양한 관객들에게 어필 될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전통 한복이나 전통 음식 등, 이미 인기 있는 상품들로 세계시장에서 그 가치를 높이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진실 된 무대의 ‘공연’이라는 장르가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파급력 있는 ‘킬러콘텐츠’로서 자리 잡기를 소망하는 바람이다.
2) 스토리가 있는 문화재 놀음판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김홍렬)은 전통문화 전승, 보급, 창조적 계승을 위한 다양한 사업과 세계의 무형유산 발전을 위해 국제간 협력사업을 추진하는 30년 역사의 전통문화전문 특수법인이다. 이 곳의 산하기관인 코우스(KOUS)는 대치동 소재로 2003년 4월 정식 개관한 이래 250석 규모의 전통예술 소극장으로써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대개의 전통공연들이 한두 번의 공연으로 막을 내리지만,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두각을 보이는 가능성 있는 전통공연물을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 속에서 경쟁력을 갖춘 레퍼토리로 성장시키기 위해 재단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원작을 보다 강력한 볼거리로 ‘재창작’하는 것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있었던 원형 그대로의 비장함에 스토리텔링이라는 새로운 상상력을 부가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작곡보다는 전통의 명곡을 쓰고 안무(按舞)보다는 명무(名舞)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용부, 정영만과 같은 중요무형문화재가 무대에 뛰어들어 판을 벌여 그들이 가진 원형의 예술은 손상치 않고 맛깔스러운 수다로 주절대는 것, 바로 이 오래된 숙원을 멋지게 꾸며내는 것 또한 <왕의 춤>의 목표라 할 수 있다. 이 부가되는 스토리텔링의 모델을 처용무에 지극한 ‘연산군’으로 하였고, 그의 후궁 녹수, 그리고 가상인물인 ‘풍무’라는 광대 등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작품 하나를 앙코르하여 30주년 기념이란 타이틀을 붙인 것이 아니라, 30년의 노하우 속에서 새로운 형식의 전통공연을 접목하여,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통의 세계화’라는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진일보하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만한 잘 차려진 밥상에 호탕한 추임새로 맛있게 떠먹어줄 관객과의 한 판, 엣지 있는 전통고수들의 신명나는 놀음판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3) 제작 배경
(1) 루이14세의 춤 선배, 연산
무용사에서 최초의 전문무용수로 거론되는 사람은 루이14세(1638 -1715)다. 그는 하루 세 시간씩 연습하고 무대에 섰고 그가 맡았던 태양신 아폴로 배역에서 세계사에 기록되는 별명 ‘태양왕’이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150년가량의 춤 선배가 있으니 조선의 왕 연산(燕山君, 1476-1506)이다. 그는 특히 처용무의 명무였다. 환관 김처선(金處善 ?-1505)을 처단하고 모든 문서에서 그의 이름 처(處)자를 사용치 못하게 했다. 아뿔싸! 그토록 아끼는 처용무(處容舞)도 처(處)가 들어가 있었다. 하여 풍두무(豐頭舞)라 개명하고 구중궁궐을 세트로 밤드리 노닐었다. <왕의 춤>은 바로 이 연산을 중심으로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무악극(舞樂劇)이다.
4) <왕의 춤>인가?
(1)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산
국가의 최고 권력자, 그 권력을 남용하여 폭군이라는 지칭으로 이름을 떨친 조선 제 10대왕 연산군. 어미가 죽고 비빌 언덕 하나 없어 민둥산이인 그에게 폭군이라는 지칭은 너무나 절박한 끝자락의 외침으로 번져온 듯하다.
그 기억 저편에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람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다면, 누군가의 위로에 정에 겨워 이생 사는 이유가 있었다면 그 독기 머금은 칼날이 조금은 무뎌졌을 것 인데 …
마음이 강퍅할수록 여린 것이 사람의 마음이거늘 연산도 그리했으랴,
傳曰: “處容舞能者論賞, 不能者以違令律論斷”
전교하기를 “처용무에 능한 자는 상주고, 능하지 못한 자는 명령을 어긴 율로 죄를 논하라”
_ 조선왕조실록 연산56권 중
춤을 잘 추냐 못 추냐에 따라 죄의 여부가 결정되니 이 어찌 재미난 장면이 아닐는지
고독한 궁궐의 한량, 마주 서있는 처용의 움직임은 벌거숭이인 그에게 유일한 낙이요, 벗이었을터
왕의 춤, 상상만으로도 그 재주가 노름마치다.
(2) <무악극>, 새로운 공연 형식
전통예술 중 외워 기록할 수 있는 말로 된 각본은 전해졌으나 글귀로 전환되지 못한 몸의 기법들은 흩어져 버렸다. 극에 속하지도 않고 춤에 속하지도 않지만 절묘한 단말마로 관객에게 각인되었던 동작을 다시 찾아 우리시대의 전통의 진화된 표현양식으로 삼는 것이 무악극舞樂劇)이다.
무악극, 말 그대로 춤과 악과 극이 어우러진 형태를 지칭하는데, 언어적인 것보다 몸짓이나 춤으로 줄거리를 표현한다. 말은 새로 지었으나 법은 예부터 있어왔다. 굳이 무악극이라 따로 부르는 것은 단순히 옛것을 살리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예술이라 부르기 전 오로지 관객의 박수만으로 밥을 벌던 시절의 치열한 기법들을 차용해 전통이 오늘에 살 틈을 찾는 비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3) 2010년, 업그레이드 된 <왕의 춤>
작년 <왕의 춤>을 가만히 살펴보면 춤의 테크닉이나 비주얼이 하용부나 김운태에게 쏠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보다 새로이 기획 된 2010년 <왕의 춤>은 정말 왕의 ‘왕’다운 면모를 부각시킬 수 있는 장면전환과 이야기 전개가 보충되었다. 이점은 연산과 녹수의 캐릭터가 더 명확해지고 그 스토리 또한 더 간결하고 드라마틱해졌다는 말이 된다.
무대 위에서 캐릭터의 명확함은 장면과 장면에서 표현되는 춤의 비중과 내러티브와의 연계성이다. 이번 무대에서 춤꾼 연산은 총4가지의 판을 보여주는데, 첫 번째로 광대 분장을 하고 오히려 광대를 놀리는 장난 가득한 미얄할미춤과, 처용에 능한 왕답게 한 판 크게 펼쳐 보이는 풍두무, 또한 제 어미 폐비윤씨의 피 묻은 한삼에 안겨 아이처럼 울며 뒹구는 장면은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를 더 이상 폭군이 아닌, 어미 잃은 가여운 고아로 생각하게 할 만큼 명장면이 될 것이며, 그리고는 곧장 날선 검을 치켜들고 제 어미의 恨서린 죽음을 또 다른 죽음으로 위안 삼는 월도무까지, 가히 소극장의 규모와 딱 들어맞는 진옥섭 감독의 연출력과 구성력이 돋보이는 장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극과 극을 달리는 감정기복의 포물선은 우리 전통의 춤사위와 더불어 현대무용의 거침없는 표현력까지 타고 흐르며, 우리 전통 악기들의 시나위 향연 또한 더욱 심장을 조이며 다가 올 것이다.
(4) 다양한 장르를 한 무대에서 구현
무악극의 첫 작품은 연산의 고사를 연희하는 왕의 춤이다. 예서 그리고 줄거리의 실현보다는 장면의 구현을 좆는다. 이는 언어를 배제한, 마치 탈춤의 노장과장 같이 육체의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형식을 갖는다.
줄거리의 서술은 굿판에서 신의 내력을 가무를 통해 이야기하는 ‘본(本)풀이’의 형식을 차용하여 표현한다. 구체성의 배제는 역사적인 것에 얽매이는 리얼리즘을 벗어나서 보다 확대된 표현을 할 수 있고 관객의 이해와 양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명무에 초점을 두어 하용부, 김운태, 진유림, 박영수 등 명무전을 빚낸 명무들이 출연하여 지극한 몰입의 5분을 경험케 한다. 이는 새로 고안한 창작적인 춤 보다 있어왔던 춤의 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확신에 찬 표출이다. 즉 가면극, 무굿, 전통명무, 풍물이 모두 한 무대에서 동시에 구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군무의 경우, 무용수들이 <처용무>와 풍물의 <판굿>을 겸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겸비가 공연의 성패가 되기에 준비 대부분이 군무의 훈련에 주력해야 했다. 김운태의 조련으로 전 단원이 1년 이상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에 있는 제주민속촌에서 하루 3회의 공연을 하면서 합숙훈련을 하였다. 이 땅에서 가장 느린 춤 <처용무>부터 가장 빠른 춤인 판굿의 <솟음벅구>까지의 벅찬 학습을 성취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익을 대로 익어 ‘굿이 핀다.’는 그 결정적인 장면을 선보일 것이다.
3. 미리 듣는 제작진의 한 마디
술이불작(述而不作)! 대본 ․ 연출_진옥섭
안무보다는 명무를, 작곡보다는 명곡을, 연극보다는 묵극을 선택해 전통의 ‘있었던 그대로의 힘’을 위력적으로 활용하고픈 것이다. 곧 ‘옛 것을 풀이하되 짓지 않는 것’이 지침이다.
음은 몸의 각본이다. 음악감독_정영만
굿에는 다 있지만 다 쓰면 안 된다. 굿의 음악이 신을 달래고 사람의 발짝을 떼게 한다. 버선 밑에 징검다리를 넣어서 춤이 살살 나와야 진짜 ‘베리 굿’이 되는 것이다.
유에서 무를 창조한다. 의상_신근철
생각을 하나씩 지우고 장식을 하나씩 뺀다. 그리고 쾌자 하나만 걸쳐도 배역의 변화를 갖는 굿처럼, 배경을 죽여 배역을 살린다. 그 골자만 남은 데에 딱 한번 화려한 치레를 한다.
4. 이후 글
1)줄거리
영성한 기록에서 발원한 절묘한 상상
작품의 배경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최고의 기록<조선왕조실록>. 그러나 연산군 당대의 기록은 실록(實錄)이 아닌 일기(日記)이다. 폐위 되어 군으로 강등했기 때문인데, 펼치면 참으로 부실하다. 이 부족한 기록에서 풍부한 상상이 발원했다.
傳曰: “每旬揀選豐頭舞五人以啓。” 王善豐頭舞, 每於宮中, 自着假面, 戲舞以娛,嬖姬又善男巫之戲。 率諸寵姬及興淸等, 設野祭于隙地, 自爲死者之語, 窮極其狀, 諸嬖幸合手觀聽。 王作死者泣狀, 諸興淸亦哭, 遂悲感痛哭而罷。
전교하기를, “열흘마다 풍두무 잘 추는 자를 5인씩 간택하여 아뢰게 하라.”하였다. 왕이 풍두무를 잘 췄으므로, 매양 궁중에서 스스로 가면(假面)을 쓰고 희롱하고 춤추면서 좋아하였으며, 사랑하는 계집[嬖姬] 중에도 또 사내 무당놀이를 잘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모든 총애하는 계집과 흥청 등을 데리고, 빈터에서 야제(夜祭)를 베풀었는데, 스스로 죽은 자의 말을 하면서 그 형상을 다 하면 모든 사랑하는 계집들은 손을 모으고 시청하였다. 왕이 죽은 자의 우는 형상을 하면 모든 흥청들도 또한 울어, 드디어 비감하여 통곡하고서 파하였다.
연산 61권, 12년(1506) 1월 2일
處容舞能者論賞, 不能者以違令律論斷。 “처용무에 능숙한 자는 상주고, 능하지 못한 자는 명령을 어긴 율[違令律]로 죄를 논하라.”- 연산 56권, 10년(1504) 12월 28일
작품의 배경이 되는 홍포(紅袍里)가 바로 상상에서 생겨난 마을이다. 홍포리는 연산에게 벼슬을 받고 남으로 낙향한 광대가 이룬 섬마을이다. 해마다 시월이면 굿을 하는데, 폐위되어 강화에서 숨진 연산을 위한 해원굿 ‘연산새남’이다.
전체의 줄거리
굿을 시작하기 전 촌장은 마을이나 인근 재인 중에 재주가 빼어난 자를 택하여 마을을 연 광대 조상 풍무, 연산, 장녹수를 연희할 3인을 뽑아 근신케 한다.
굿이 시작되면 바다를 상징하는 파란 천을 들고 들어와 향을 사르고 펼쳐, 처용의 얼굴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촌장이 북을 울려 조상들께 굿을 고한 다음, 영무를 추어 “춤의 신 처용을 모셨으니 춤의 왕 연산은 듭시오!” 하면서 곤룡포와 처용탈이 담긴 지동궤(마을의 중요한 물건이나 문서를 보관하는 함)를 연다.
상소문을 뜻하는 흰 천이 연거푸 등장하면 연산은 그 위를 유유히 거닐며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듯 죽일''殺''을 몸에 인 친다. 그리고 곤룡포를 입으면, 늙은 할미가 폐비 윤씨의 피 묻은 한삼을 보이고, 이내 광기에 휩싸여 월도(月刀, 관우의 청룡도와 같은 창))를 들고 복수를 시작한다. 연산의 광대 풍무는 처용탈을 꺼내들고, 죽을 것이라 말리는 녹수를 뿌리치고 왕에게 진언한다. 분노한 연산은 월도를 겨누는데 녹수에 의해 저지되고 풍무의 마지막 춤에 감탄한 연산은 곤룡포를 벗어준다. 그리고 모친의 위한 야제를 벌이는데, 이때 녹수가 춤을 추어 폐비윤씨의 한풀이를 한다. 연산은 녹수에게 숙용의 작호를 내리고 탈을 쓰고 처용무를 춘다.
춤이 끝나면 연산의 처용탈이 다시 지동궤에 담기면 악공들은 주악을 올리고 소지를 올린다. 그리고 하나둘씩 홍포로 갈아입고 판굿을 벌여 ‘오채질굿’과 ‘오방진’을 하면 촌장이 나와 “아해야! 동창 남창이 다 밝았다!” 하면서 굿을 맺는다.
극중 주요 인물
풍무 김운태
‘바람의 춤’이라 불린 경중우인(京中優人), 원래의 장녹수를 수하에 둔 모갑이로 녹수의 추천으로 궁중의 연회에 불리는 왕의 광대가 되었다. 그러나 피에 젖은 연산에게 직언했고, 죽임을 당하기전 마지막 춘 춤으로 곤룡포를 하사받고 낙향해 홍포리의 시조가 된다.
촌장 : 하용부
광대 풍무가 개척한 용포리의 촌장. 대대로 연산을 위한 새남굿을 해왔다. 받드는 신위는 춤의 신인 처용을 모신다. 그리고 춤의 왕 연산의 본풀이를 하는데, 촌장이 북을 들고 선조에 굿을 고한 다음, 영무(靈舞)를 추어 연산 신령의 강림하게 한다.
녹수 : 진유림
연산이 총애한 가무에 능한 여인. 사당패와 떠돌던 시절 패의 모갑이였던 우두머리 풍무가 연산에 직언하다 죽게 되자 다시 춤추게 하여 살길을 연다. 그리고 연산이 벌이는 야제(夜祭)에서 폐비윤씨를 위로하는 너울춤을 추어 숙용(淑容)이란 작호를 받는다.
연산 : 박영수
처용무에 능한 왕. 어머니가 폐비되고 사약을 받고 죽을 때 입었던 피 묻은 옷을 보고 걷잡을 수 없는 광기에 휩싸인다. 사화를 일으켜 이내 피바람을 부른 폭군이지만, 고독한 밤이면 구중궁궐을 밤드리 노닐면서 처용무를 추는 명무다.
마로 : 양호성
홍포리의 촌장의 아들로 마을 굿의 상쇠. 선조가 하사받은 홍포를 받들고 판굿을 벌인다. 우회전과 좌회전으로 이루어진 ‘오채 질(길)굿’과 동서남북, 중앙으로 나선형으로 감았다 풀면서 벽사(辟邪進慶)을 하는 ‘오방진’의 명수다.
2)<왕의 춤> 눈 대목과 주요출연명무
화려한 격정에 휩싸인 질풍노도의 시간.
풍두무 (박영수 춤)
통일신라의 경주, 고려의 평양, 조선의 한양으로 서울에서 서울로 전해진 최고의 서울춤. 이를 지극히 사랑한 연산이 춤에 몰두했고, 처용무를 풍두무로 바꿔가며 춤을 추었다. 처용무의 민간전승의 모습을 봉산탈춤의 목중춤으로 본 김일출(조선민속탈놀이의 저자)의 견해를 참고하여 봉산탈춤의 목중춤과 오방처용무를 습합한 박영수의 처용무. 궁중의 품격과 민간의 ‘물결 부딪혀 흐를 격(激)’이 만나는 격정의 춤으로 거듭난다.
솟음벅구 (김운태 춤)
정녕 군더더기를 모두 털어야하는 최고의 서울춤. 소고를 치면서 솟구치는데, 머리에서 상모를 한 박에 좌우로 두 번 돌리는 ‘양상’을 친다. 이 번갯불에 콩 굽는 일을 을 이룬 이가 유랑의 마지막 후예 김운태다. 초장, 중장, 종장의 세 번의 솟구침을 하면서 심장으로 구동한 백색 알피엠을 쏟는다.
영무(靈舞) (하용부 춤)
밀양 지방의 북춤과 범부춤이 위주가 된 하용부의 춤에서 자신만의 더늠을 넣은 것이 영무다. 북을 울려 장단을 충전하고 북을 내리면 그 장단이 풀리며 저절로 추어지고 마침내 휘몰아치는 휘몰이 장단 위를 어슬렁어슬렁 무중력으로 거닐어 버리는 춤이 된다.
너울춤 (진유림 춤)
여인들이 착용하던 삿갓에서 흘러내리는 휘장 너울. 이 옛 복식으로 새 춤을 내는 것인데, 명무 진유림의 너울춤은 경기도당굿과 남도 살풀이장단을 엮어 춘다. 공간치레와 장단치레가 절묘하게 만나 허공을 가르고, 마침내 쏟아지는 북소리는 앵도를 똑똑 딴다.
판굿 (양호성 상쇠)
주요 출연 명무 소개
진유림 :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나 열 살 때 흥이 과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무용학원에 갔다. 여성국극단을 떠돌던 흥이 있는 춤꾼 진소영에게 배웠고 이내 수양어머니를 삼았다. 중학교 때 배정혜를 만나면서 무용과 예술에 대해 자각이 일었는데, 춤의 운명을 알아본 진소영이 이매방과 묶어 놓는다. 당시 이매방은 특별한 거처 없이 떠돌고 있었는데, 보문동에서 승무와 살풀이춤을 깨우치면서 진정한 춤의 길에 들어섰다. 1985년 동아콩쿨 무용부 금상을 수상했고, 전주대사습 차상을 몇 차례 수상하다 이내 1989년에 장원을 한다. 그리고 숱한 춤판을 휘어잡았는데 춤에 대한 열망이 깊어 김천흥에게 정재, 김숙자에게 무속춤, 김병섭의 설장구, 박병천의 북춤 등을 배워 두루 섭렵하였다. 현재 이매방류의 승무와 살풀이춤 두 종목의 이수자이고 소리 속을 아는 춤꾼으로 명망이 높다.
하용부 : 1955년 경남 밀양의 춤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저 배우지 않아도 북소리만 들으면 둥둥 떠 살았다. 1980년 할아버지 하보경의 춤을 중심으로 구성한 밀양백중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될 때 아버지는 정식으로 할아버지의 춤을 받으라 했다. “좋다!, 쳐라!” 와 같이 놀이판의 특성상 반말이 횡행하기에 부자지간에는 놀 수가 없다하여 한 대를 거른 것이다. 할아버지를 지게에 태워 다니면서 춤을 배웠고 양반춤 범부춤 북춤을 모두 떼고 춤판을 휩쓸었다. 또한 이윤택이 조직한 ‘연희단 거리패’와 만나 그들에게 춤을 주고 연기를 받아 세계를 떠돌기도 했다. 떠도는 그의 춤이 무대에 오른 것은 1998년 명무초청공연이었다. 그날 이후 북춤과 범부가 결합된 하용부만의 춤으로 하용부류의 북춤이 되었다. 2002년 밀양백중놀이의 보유자가 되었고, 춤판 연극판에서 쉼 없이 불리고 있다.
김운태 : 1963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부친이 경영한 호남여성농악단의 유랑행렬을 따라 떠돌면서 춤을 추었다. 첫 스승은 명인 백남윤이었고, 해산한 남성농악인들이 여성농악단에 들어서자, 그들의 장기를 따면서 점차 자신의 춤을 완성해간다. 시류가 변해 여성농악단이 문을 닫자 학업에 전념했는데, 폐가한 가정형편에 때문에 요정을 돌며 춤으로 밥을 벌었고, 나이트클럽의 밤무대도 마다할 수 없었다. 1989년부터 여성 농악단을 통해 같이 활동한 이광수와의 인연으로 사물놀이에 입단하여 세계를 돌며 연주활동을 하며 다시 판으로 복귀하였다. 1993년에 민족음악원 노름마치를 창단했고, 1995년 서울두레 극장을 설립했는데, 지금은 모두 접고 독립춤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호남, 영남, 경기, 충청을 모두 통합한 장쾌한 소고춤으로 나서자마자 ‘김운태류 채상소고춤’으로 불리며 명성이 자자하다.
박영수 : 1963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문학소년으로 자랐다. 가정 형편상 공고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하는데, 근처 무용학원에서 나는 덩쿵! 소리에 점차 춤에 대한 열망이 생겼다. 문을 민 곳이 서대문 응암동에 있던 황해도 탈꾼 김유경의 ‘봉산탈춤 연구소’였다. 탈 만들기 한삼 재봉하는 것 등을 시작으로 봉산탈춤 전 과장을 배운다. 특히 배역을 다 갖추지 못할 정도로 단원이 없었던지라 박영수는 늘 일인다역으로 분주히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93년도에는 경희대 무용과에 입학하여 탈춤과 한국무용의 다른 무법사이를 오가며 수련을 하였고 대학원 때는 김말애 씨가 이끄는 춤타래무용단에서 남자 주역을 맡았고 93년도에는 서울예술단에서 무용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는 관계로 점차 김유경의 춤사위를 찾는 이들이 적어지자 단체에서 나와서 ‘춤터 세마루’를 만들어 김유경의 춤사위를 전하고 있는데, 봉산탈춤의 백미인 <노장춤>과 <첫목춤>의 명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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