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여행지] 김훈소설 남한산성과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2007년 4월 남한산성은 새롭게 깨어났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으로...
김훈 선생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읽고나서 다시한번 남한산성을 찾았다.
그동안의 남한산성은 먹고 마시고 노는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고 남한산성의 역사유물관에는 극난극복의 현장이라는 황당한 문구를 걸어놓고 역사왜곡으로 후손들에게 조상의 빛난얼을 전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 인것은 먹고 마시고 노는 장소로만 개발하고 역사유적 발굴에는 등한시 하던 정부에서 늦게나마 옛 유적 발굴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남한산성의 옛 별궁터에는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남한산성에 역사관에 걸린글을 보면 “ 인조는 성내의 아군을 이끌고 결사항전하며 수차례 적의 대대적인 공격을 물리쳐 성을 수호하였다”라고 적어져 있다.
또 남문안내판에서는 “ 병자호란의 치욕을 간직하고 있는 곳지만,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항전의 전적지로서....”라고 적혀있다.
성을 수호하였고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곳이라면 삼전도에 있는 비는 무엇이며 세자가 청나라에 끌려간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성이 함락되지 않고 문을 열고 나아가 항복만 했으니 성은 수호 된것이고 그러니 국난극복의 현장이고 대외항전의 전적지라는것인지... 그렇다면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주리호 전함에서 항복을 하였으니 일본은 패망 한것이 아니고 국난극복을 한것 이라고 말 할수 있다는 것도 같은 것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370년전의 그 역사의 현장에는 무슨일이 일어났었고 왜 우리는 그역사를 잊어버리고자 노력하고 그역사를 은폐하고 있었을까?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 역사왜곡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우리는 왜 우리에게 일어난 역사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왜곡하면서 삼전도비에는 페인트칠을 하고 남한산성의 유적은 발굴하지 않고 있었던가?
우리가 역사를 배움은 그역사에서 자랑스럽고 민족의 긍지를 느끼기 위해서기이고 하지만 역사로부터 많은것을 배우고 수치스런 역사나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가 있다면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일것이다.
370년전의 남한산성에서 일어난 일에서 오늘날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울수 있을 것이다.
김훈선생님의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모든일이 허구라 할지라도 우리의 역사를 미루어 짐작컨대 그비슷한 일 아니 그보다 더 심한일이 일어날수도 있었음을 우리는 국난극복의 현장에서 벌였던 양반들과 당파들의 황당함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에서도 우리나라의 노블리스(명예)만큼의 오블리제(의무)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얼마나 황당했었는지 알수가 있다.
반란으로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후 그 칼이 무서워 무를 버리고 천시하고 문만을 강조하면서 명나라에 사대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룬것 처럼 양반들 득세에만 전전긍긍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의 치욕을 당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임진왜란을 극복한 영웅들과 민초들을 외면하고 숙청하고 폐기처분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덮고 당파의 이익만을 �다가 결국은 왕을 폐위시키고 당파 싸움만 일삼으면서 국제형세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비는 전혀 하지않고 안전인수격으로 놀아나면서 척화만 주장하다가 남한산성의 치욕을 당하고 만것이다.
또다시 외적의 침입을 당하니 그동안 명예와 권세를 다가지고 있던 양반들은 자신의 할 일을 방기하고 임진왜란때처럼 민중들이 봉기하여 외적을 물리쳐 주기를 바랐을것이나 사람이 한번속지 두 번 속을까 어차피 또 구해주면 나중에 구해주었다고 죽이고 귀향보내고 짓밟을텐데 어느 정신병자가 그런일을 두 번 당하고 있을것인가 말이다.
그러니 인조와 그무리들이 남한산성에서 굶다굶다 그나마 몇몇의 원군이 오긴했으나 임란이후에 영웅의 씨앗이 거의 말랐으니 제대로 대적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굶어 지쳐서 제발로 나올 수밖에...
그때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왜 그다지도 오늘날과 그렇게 닮은곳이 많은지 왜 우리는 그런꼴을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당파싸움이나 하고 부정부폐가 판을 치고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켜면 황당한 영상들이 뜨고 있는지 알수가 없다.
하기야 옛것을 보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위치와 명예에 따라서 다 같을수는 없으니 오늘날의 명문가들 권세가들은 그시절이 얼마나 그리울까... 양반들은 군역(병역)의 의무도 없고 납세의 의무도 없고 일부일처다첩의 권리등 다양한 권리만 주어졌으니 지금생각해보면 그시절이 그리울수도 있을게다
조선이 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일본에 무릅을 꿇고 말았는지 광복을 하고서도 왜 일제 잔재 청산을 하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득세하는지 왜 우리는 남북으로 나뉘어 오늘도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조선을 보면 남한산성을 보면 알수가 있을 것도 같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그런 중요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노블리수 오블리제를 행해야 할 인사들은 주색잡기에 도취하고 남한산성은 힘없는 승려들을 승군이라고 호칭을 주고 이곳에 끌어다가 성벽을 쌓게 하고 이곳을 지키게 했으니 그들이 무슨 정성으로 이곳을 다듬고 아낄수가 있었을것인가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섰으나 오늘날의 그 흔적만이 남아 있어서 그동안 버려놓았다가 2002년도에도 겨우 유적 발굴이 이루어 지기 시작한것이다.
기본자료 참조사이트
http://www.namhansansung.or.kr/index.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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