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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아름다운 임꺽정과 궁예의 전설이 서려있는 안성 칠장사

경기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8. 11. 16.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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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꺽정과 궁예의 전설이 그리고 혜소국사비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단풍이 아름다운 칠장산

 칠장사를 찾았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에 위치한 칠장사는 찾아가려면 중부고속도로 음성ic를 나와서

 광혜원을 지나 17번 국도를 따라 죽산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편으로 칠장산 방향으로 들어가다

보면 철당간이 칠장사의 역사를 알려주는듯 하늘을 향해 우뚝 서있다.  

당간이란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장엄용 불교 용구인 당(일종의 깃발)을 달기위한

 깃대를 말한다.

이철당간은 조선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칠장사 철당간외에 청주시내 한가운데 남아있는

 용두사지와 공주 갑사에서 만 볼수 있는 몇 개 남지 않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칠장사 철당간은 원래 30개의 원통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9.75M 높이에 14개의

원통이 남아있으며, 제일 아래칸은 길이 68cm, 지름 45cm의 원통으로 하단에 각 칸간 연결을

 위한 폭 6cm의 반구형 마디를 마련하였다.

4번째 칸의 경우는 지주와의 연결을 위해 상하로 마디를 두어 마디 두개가 서로 연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각 마디위로는 1조의 양각선을 횡으로 둘렀다. 9번째 칸과 12번째칸에는 각각

 「十正」, 「十一」의 명문이 세로로 양각되어 있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 수도하고 입적한

 고려 때 고승 혜소국사가 현재 비각이 있는 자리에 홍제관이라는 수행처를 세웠고, 현종 5년

(1014)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칠장사는 예로부터 깊은 차령산맥이 그 줄기를 품고 있어

 고려 말 왜적의 침입이 잦을 때 사서를 칠장사로 옮겨 8년간 비장해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빛 바랜 단청이 역사를 대변해 주는 칠장사 대웅전 오른쪽 옆에는 보물 제983호로 지정된 안성

봉업사석불입상이 자리잡고 있다. 8세기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수작으로 평가받는 이 불상은 원래

 죽산면 봉업사 터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에 옮겼다가 다시 칠장사로 옮긴 것으로 우리 불교의 지난했던

 역사를 대변하는듯 오늘도 칠장사 한구석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전해주려는 듯 처연하게 서있다.


입상과 광배가 동일석으로 조성된 불상은 두광 아래로 발께까지 신광이 표현되어 있고, 큼직한

 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불상에 비해 대좌는 풍상의 흔적이 적은 깨끗한 화강암이다.

불상은 특히 얼굴의 눈ㆍ코 부분이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을 빚은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오른손을 들어 살포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차분히 내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

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자태가 일품이다. 어깨에 걸쳐 가슴을 타고 내린 얇은 법의의 선, 3기

의 화볼을 인 두광, 그 뒤로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대의 조각 솜씨가 그 시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명부전 뒤로 하여 칠장산 방향으로 언덕을 올라가면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보물 제488호 칠장사혜소국사비가 나온다.

혜소 국사는 972년 (고려광종3)안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이 이씨요 이름은 정현(鼎賢)으로

 10세에 삭발 입산하여 광교사 충회에게 구법하고, 17세에 영통사에서 융철(融哲)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28세에 왕명에 의하여 고승으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다.

대사는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면서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며, 1054년(문종8)에 이 절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

이 비신의 높이는 3.4m, 폭은 1.28m이고, 귀부(龜趺)의 귀갑(龜甲)은 방원형, 비몸돌(碑身)의

 양면에는 여의주(如意珠)를 가지고 노는 범 비슷한데 비늘이 있다는 짐승인 이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비몸돌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비몸 위에 올려지는 부분인 이수

에는 거북과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각 장수를 상징하며, 물과 지상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이것은 비의 주인공인 혜소 국사의 영혼을 천상세계

로 인도하며 비문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의미를 가지며,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를 들여다보면 비석이 두동강 난 모습을 볼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기이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임진왜란 때의 일이라고 한다. 왜장 가또가 북상하다가 칠장사에 들어

 왔다. 그리고는 부하들을 시켜 보물이나 값 나가는 물건의 노략질은 물론 부처님을 모독하고 기물

을 파괴하며 스님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때 갑자기 한 고승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가또를 항하여 큰소리로 힐책하기 시작했다."네 이놈,

 아무리 짐승같은 놈이라 할지라도 이곳이 어딘 줄 모른단 말이냐. 여기는 신성한 부처님의 집

이니라. 썩 물러가거라. 미물도 이곳을 지날 때는 발꿈치를 들고, 이리 늑대 호랑이도 이곳을 침범

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의 탈은 쓴 네놈들이 부처님게 행패를 부리다니 천벌이 무섭지도 않느냐!

평화로운 조선땅을 침략한 죄도 용서받지 못할 대죄이거늘 삼천리 강산을 만행하고, 가는 곳마다

 부처님을 능멸하니 이는 목이 백이요 천이라도 모자랄 크고 큰 죄이니라. 이놈! 썩 물러 가거라!"

 왜장 가또는 분기탱천했다. (감히 늙은 중이 누구에게 호령하는 가?)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

 고승을 쳤다. 그러나 고승은 간데 없고 혜소국사비만 두 동강으로 나 있었다.

일설엔 또 이렇게 전해 오기도 한다. 왜장 가또가 이 절을 향해 진군해 오는데 경내에 서기가 어려

 있었다. 이상한 일이라 여겨 급히 와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절을 지나쳐가다가 다시

 돌아보니 역시 경내에 서기가 어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서기가 어려 있고, 정작 가까이 가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마음에 꺼렸다. 이건

 필시 심상치 않은 것이라고 여기고 다시 절로 발길을 돌렸다가 또는 경 내 구석구석을 살폈으나

 그럴만한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혜소국사비의 조화라고 생각하고 그 비석을 두 동강이를

 내 버렸다. 그리고 북상하다가 돌아 보니 경 내에 서기가 없어진 것을 알고 가또는 마음 놓고

 북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혜소국사비 바로 옆에는 나한전이 자리잡고 있는데 한 칸 크기의 나한전은 나옹스님이 심었다는

 수령 620년이 지난 소나무와 함께 자연 암반 사이에 어우러져 있다. 이곳이 유명한 7나한(혜소

국사가 교화시킨 일곱도적)의 동자상을 모신 곳이다.

조선조 500년 동안 칠장사는 3번 전소되었으나 나한전만은 건재하고 있으며, 특히 조청으로 만든

 과자(한과의 일종) 공양을 올리면 영지를 얻는다 하여 조선조 내내 과거시험에 장원을 꿈꾸던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박문수어사도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린 후 장원급제를

 했다고 전한다.


예전에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七賢山)은 아미산으로 불렀다. 사찰 이름도 ‘칠장사(七長寺)

’ 대신 ‘칠장사(漆長寺)’로 불렀다고 한다. 사찰명이 칠장사(七長寺)로 고쳐지고 산이름도

 칠현산으로 불린 연유는 일곱명의 도적을 교화시킨 혜소국사의 설화에서 기인한다.


시기는 고려시대(11세기경)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칠장사에는 법력이 뛰어난 고승인 혜소

국사가 주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칠장사 인근에는 악명 높은 도적이 일곱 명 숨어 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밤에 몰래 절에 들어와 물을 마시려다 보니 물바가지가 순금으로 되어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도적은 금 바가지를 훔쳐서 동료들에게 자랑했다.

그래서 나머지 여섯명의 도적들도 밤마다 칠장사에 치레대로 숨어들어와 바가지를 훔쳐다가 보물

창고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일곱 도적들은  욕심이 생겼다.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두개의 금 바가지를 가져야

겠어.” 각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칠장사로 숨어들어 금 바가지를 훔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도적들이 매일 금 바가지를 훔쳐 가는데도 어김없이 절에는 금 바가지가 있는 게

 아닌가. 도적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훔쳐서 감춰놓은 온 금 바가지를 확인하기

 위해 비밀창고 문을 열었다.


“아니, 내가 훔쳐온 금 바가지가 없어졌어.” 다른 도적들도 자기들이 숨겨놓은 곳을 확인해

 보니 감쪽같이 금 바가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깜짝 놀란 도적들은 이모든 것이 혜소국사의

 도력 때문인것을 알고 두려움을 느껴 절에 찾아가 용서를 구하다가 혜소국사의 도량에 감복

하여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칠장사 이름도 일곱 명의 도적을 제도했다는 의미를 실어

 칠장사(七長寺)로 고치고 사찰이 위치한 아미산도 칠현산(七賢山)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7명의 도적은 나중에 성현이 되어 7명의 나한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때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박문수는 태어날 때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었다. 부친은 박문수의

 아버지는 늦게까지 자식이 없자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으로 100일 기도를 발원했다. 때마침 어떤

 스님이 찾아와 말하기를 기도는 절에서 하지 말고 집에서 문수보살을 생각하며 하라고 했다.

그래서 99일 동안을 날마다 하인을 시장에 내보내 스님 한 분씩을 모셔오게 해서 공양을 올리며

 기도를 했다. 100일째 되는 날은 정성스럽게 공양을 준비하고 스님을 모시러 간 하인이 혼자

 돌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그 스님이 문둥병 환자였다는 것이다. “병이 너무 깊어 몸 전체에서 고름이 뚝뚝

 떨어지고, 턱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침이 줄줄 흐르는 스님이었습니다.”

그러자 박 어사의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님을 행색을 보고 평하면 안되느니라 어여가서

 모셔오너라”

결국 하인은 스님을 모셔왔고 정성껏 공양을 올렸다.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공양을 받아 먹었다.

 박 어사 부부는 “이렇게 저희들이 마련한 공양을 받아 주셔셔 감사합니다”라며 인사를 올렸다.

 문둥병을 앓고 있던 스님은 고름을 뚝뚝 흘리며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넘어서자 스님의 고름은

 연꽃으로 변하며 문수보살의 모습을 띠며 하늘로 올라갔다. 박 어사 부부는 곧 새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고, 이름을 ‘박문수’로 지었다.


장성한 박문수가 과거 때가 되자 집을 꾸려 한양으로 향하다가 칠장사에 하룻밤을 머물게 됐다.

박문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만들어 준 조청유과를 나한전에 올리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번 과거시험에 출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기도를 마친 박문수는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에 나한이 나타나 “ 과거 시험  보여줄 터이니 잘 기억

하거라.”하면서 하얀 종이와 붓을 꺼내 시제를 써 내려갔다. 깜짝 놀란 박문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본 시제가 또렷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며칠 후 과거시험장에 들어간 박문수는 깜짝 놀랐다.  칠장사 나한이 알려준 시제가 그대로 나온것

 이었다.

어려움 없이 시제에 따라 문제를 푼 박문수는 장원급제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돌아오는 길에도 박문수는 칠장사에 들러 유과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몽중등과시

(夢中登科時)’라고 전해져 내려오는내용이다. 이후 박문수는 암행어사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공명정대한 명성을 날렸다.

내가 칠장사를 찾았던 날도 많은 신도들이 나한전 앞에서 멍석을 깔고 기도를 하고 있어서 나한전에

 접근 할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

 

안성 칠장사가 다른 사찰과 다른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의적 임꺽정과 궁예가 칠장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대웅전 왼편에 위치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된 명부전 외벽에 벽화로 그려

놓은 것이다.

 

 명부전 벽화에는 한눈을 가린 궁예가 말타는 모습이나 수행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궁예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47대 헌안왕(憲安王) 의정(誼靖)이거나 48대

 경문왕 응렴(膺廉)라고 전해져 오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궁녀라고 전해져 온다.

궁예는 왕실에서 버림받고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가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불도에 들어  이곳

 칠장사에서 13세까지 활쏘기와 무예를 연마했다고 하는데 궁예의 어릴 적 활 쏘는 모습이 이곳

칠장사 명부전의 벽화로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엿볼수가 있다.

 

 

다른 편 벽멱에는 의적으로 유명한 임꺽정과 병해대사의 교류를 말해주는 듯 병해대사와 임꺽정과

 6인의 도적 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백정의 아들로 천민이라 설움을 받던 임꺽정은 칠장사에 법력이 높은 고승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칠장사에 찾았다. 

임꺽정은 갖바치 출신인 병해대사를 만나 생불로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병해대사의 법력에

 감화받은  임꺽정과 도적무리들을 제자 되기를 청하고 병해대사는 이를 받아들여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신분제도상 하층민이었던 갖바치 출신이었던 병해대사는 임꺽정과 그무리들에 대해 심정정으로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병해대사와 임꺽정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칠장사 아랫마을에서는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조선

시대의 수탈이 얼마나 자심했는지 알수 가 있다.


칠장사에는 임꺽정이 봉안한 것으로 전해져 ‘꺽정불’로 불리고 있는 칠장사 소장 목조불상이 있는

데 충북대 연구팀의 연대측정결과 임꺽정이 활동했던 시기와 일치하는  조선중기 154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칠장사와 임꺽정의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자료참조]

http://tour.anseong.go.kr

http://www.칠장사.kr/


[안성 맛집]

<걸미해장국 소머리국밥> 소머리국밥, 해장국,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당목리 967-1  / 031-671-8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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