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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의 희생양 박열의사 생가 기념관 문경 여행

경상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21. 5. 2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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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감독이 연출하고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가 주연한 영화 박열이 20176월 개봉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일본에서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 이라는 독립운동가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 박열의 주인공이었던 박열의사가 태어난 고장인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가면 박열의사의 생가지였던 초가집과 박열의사를 알리기 위해 조성된 박열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박열의사 생가지 입구에는 서울시 서대문에 세워진 독립문을 모티브로 해서 조성된 독립문 형태의 출입구가 사람들을 반기는데 오른쪽에는 박열열사의 생가지가 초가집으로 복원되어 눈길을 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48호로 지정된 박열의사 생가지는 작은나무가지로 울타리를 친 속에 두칸의 방과 부엌이 있는 초가집과 창고와 외양간 역할을 했던 초가지붕을 올린 두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박열의사 생가지 맞은편에는 박열의사의 동지이자 애인으로 19223월 도쿄에서 박열을 만나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항일운동에 투신하고 박열과 옥중결혼을 올린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박문자로 활동 하면서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하였으며 박열을 도와 일왕 부자를 폭살 하기 위한 폭탄 반입을 추진하고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다가 1926년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박열의사 생가지 뒤편에는 2001년 문경시 점촌에서 박열의사의 애국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박열의사 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2002년 박열의사 기념사업 기본설계를 하고 2012년 준공한 박열의사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박열의사기념관은 콘크리트 2층 건물로 조성되어 제1전실과 제2전시실로 구성되어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전시관은 문을 닫고 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찾아 보았다.

 

 

박열은 3세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타고난 총명함으로 대구 도지사 추천을 받아 현재 경기고등학교인 경성고보사범과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 가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지하신문을 발행하고 격문을 전달하면서 3.1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박열의사는 191910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920년 재동경 조선인 학생 들로 구성된 의거단을 결성한 이후 계속 명칭을 바꾸면서 활동을 하다가 19211129 동경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인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조직인 흑도회를 창립 하였다.

 

 

박열의사는 1923년 불령사를 조직하고 일본 히로히토왕자를 암살하려한 대역사건으로 검거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923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에게 누명을 씌워 6,000여명을 학살하고 그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대역죄혐의로 불령사 조직원을 전원 구속하였다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하여 형법 제73조 대역죄적용 공판개시하자 공판에서 박열은 조선예복을 입고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한복을 입고 4회 공판까지 당당히 맞섰으나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박열은 일본 패망 이후에 석방되었다.

 

 

백범 김구선생의 요청으로 19463의사(윤봉길,이봉창,백정기)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으로 세분 열사의 유해를 발굴 본국으로 봉환하고 103일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단하여 단장으로 취임한 박열의사는 1948년 귀국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1974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박열의사 생가 기념관

주소: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전화: 054-572-3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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