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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 서산향교 와 성암서원 서산 여행

충청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22. 4. 2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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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상여봉 남쪽자락에 자리잡은 현진에버빌아파트 앞에 자리잡은 서산향교는 조선초기인 1406(태종 6) 조선의 중심사상인 유교이념을 전국에 보급하기 위하여 전국에 군현마다 향교를 설립할 때 조성된 시설로 유교 선인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면서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서산향교는 지역유생들의 수차례 건의에 의해 조선 선조 7년인 1574년에 서문 밖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648(인조 26), 1669(현종 10)등 몇차례의 중수가 진행되었고 1872(고종 9)에는 흥선대원군의 흥학과 향교 운영 쇄신 정책에 의해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서산향교는 현존하는 건물로 외삼문 서재 동재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서재와 명륜당 동재가 연결되어 담장 역할을 하는 독특한 구조로 조성되어 마치 자 형태로 자리잡고 있어서 한울타리안에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다른 지역의 향교와 다르게 조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인 서산향교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재와 서재의 강학공간에서는 과거시험인 소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소학, 논어, 맹자, 대학, 중용, 근사록 등 유교에 관련된 교과목을 강의하였고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를 준비하게 된다

 

 

서산향교 내삼문 입구 계단아래에는 19821015일 시나무로 지정되었다가 200841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73호로 지정된 서산향교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둘레 430cm, 높이 33m 소유자 및 관리자가 서산향교로 되어 있다.

 

 

서산향교은행나무는 조선 이조정랑 한여현이 지어 1619년 편찬한 서산지역 최초의 군지인 호산록 향교조에 서산향교를 이전하면서 선인이 은행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 나무중 하나로 추정되는 은행나무로 수령이 440여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서산은행나무 뒤편 10계단으로 쌓여진 위에 조성된 내삼문은 성인들이 출입한다는 개념을 지닌 주출입문인 가운데문과 입구와 출구로 나뉘어 있는데 좌우문과 중앙문에 태극문양을 그려넣고 맞배지붕이 올려진 문이 세워져 있어서 강학공간과 제사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서산향교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과 제사를 준비하는 좌우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팔작지붕을 올린 기와목조건축물인 대성전에는 유교의 5성인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와 송조2현인 예국공 정호와 주자학을 주창한 휘국공 주희와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서산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 전교 1명과 장의 두어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산향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6

충남 서산시 향교126

 

 

 

충남 서산시 향교1로 서산향교에서 서쪽으로 서산시청을 지나 2.2km를 가면 서산시 읍내동에 자리잡은 1719(숙종 4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고려후기 유학자인 사암 유숙과 조선중기 유학자인 학주 김홍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 한 성암서원이 나온다.

 

 

조선 중기에 세운 성암서원에 모셔진 사암 유숙은 본관이 서산으로 개심사 밑의 양천장에서 출생한 고려후기 문신으로 원나라 수도인 중국 연경에서 공민왕을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1352년 연저수종 1등공신에 선정 되었고 13596월 지추밀원사로 기철 일당을 제거한 공로로 안사공신이 되었다.

 

 

사암 유숙은 고려말에 홍건적이 136111월 고려에 침입하자 왕에게 남쪽으로 피하도록 권하고 호종한 공로로 충근절의찬화공신을 받았고, 김용이 흥왕사에서 변란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워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가 되어 1등공신에 책록 되었고 죽은후에 덕산에 묻혔다

 

 

유숙과 함께 성암서원에 모셔진 학주 김홍욱은 증조부인 김연때 부터 서산에 정착하였으며 1635(인조1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뒤 설서를 겸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인조를 호종하여 절대 항복해서는 안된다는 강경론파의 1명이 되었다

 

 

효종11650년 홍충도관찰사(충청도)가 되어 대동법을 처음 실시하였고, 1654년 황해도관찰사 재임시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의 빈인 민회빈강씨가 억울하게 사사되었으니 신원을 해줄것을 상소했다가 격노한 왕에 의해 친국을 받다가 장살되었다

 

 

성암서원은 창건 된지 2년만인 1721(경종 1)에 나라에서 성암서원이라는 사액 현판을 내려서 사액서원의 반열에 올랐으나 1729(영조5)에 당시 붕당의 여파로 일시 철거되었다가 영조26년에 복원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고종 8)에 훼철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서산 유림이 뜻을 모아 다시 복원하였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5호로 1984517일 지정된 성암서원은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고 내삼문을 지나면 유숙과 김홍욱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이 자리잡고 있고 원지1, 중건지1, 존재유선생유고3권 등의 유물을 보관 하고 있다.

 

 

성암서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5

충남 서산시 읍내동 673

 

상기 포스팅은 서산시청에서 선발한 2022년 서산여행 SNS서포터즈에 선정되어 원고료를 받고 서산시를 홍보하기 위해 올린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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