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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여행지] 충북 단양 남한강변에 위치한 온달산성과 적성산성

충청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7. 7. 17.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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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여행지] 충북 단양 남한강변에 위치한 온달산성과 적성산성

 


충북 단양은 남한강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서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온달산성과 적성산성 등 그시대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유적지가 남아 있어서 그흔적과 발굴되는 유물로 인하여 그 시대의 치열했던 전장과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과 그리고 정치적 배경과 역학구도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온달산성 사적제264호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 67(온달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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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264호인 온달산성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남한강변옆에 있는 온달관광지내에 온달동굴과 함께 볼수 있는 곳으로 해발 427m의 성산에 축성된 길이 922m, 높이 3m의 반월형 석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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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은 남한강변에 있어서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좋고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서 올라 가볼만한 곳이기도 하다. 산성을 오르는 도중 중간에 있는 전망대인 팔각정에서 땀을 훔치노라면 어디선지 강바람이 불어와 시원함을 불어넣어주어 흥겨워지는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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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단산성을 보고 내려와 온달동굴을 들리면 땀이 식으면서 잘못하면 감기에 걸리수도 있으니 조심하여햐 하지만 여름철 피서로 그만인 방법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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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치열한 영유권 분쟁이 있던 곳으로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바보온달 장군의 무용담과 함께 평강공주와의 사랑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으로 유명한곳이다.

신라군 화살에 맞아 운명한 온달장군이 원통함에서인지 시신조차 산성을 떠나지 못했다. 이에 평강공주가 자신의 웃옷을 벗어 온달을 덮어주고 "죽음과 삶은 이미 갈렸으니 이제 돌라가라"고 온달을 달래자 그제야 온달의 관이 움직였다는 전설로 인하여 이곳 산성이름이 온달산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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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은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지의 옹성적 돌출부 등은 우리나라 고대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로안내]

▪ 단양읍 소재지 ->고수대교 지나(좌회전)->59번국도->가곡면 소재지->향산->522지방도(영월방면)->군간교->영춘교->온달관광지

 


 


 

 

적성산성 사적제265호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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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요충지임을 알려 주는 듯 적성산성 옆에는 중앙고속도로 하행선 단양휴게소가 자리잡고 있어 전쟁터 이던곳이 여행지가 된 아이러니를 느낄수 있는 곳이다.  적성산성은 신라 진흥왕때 축성된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 26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 주위 922m이고 할석(割石) 및 자연석으로 축조되었는데, 성의 기반을 토석(土石)으로 다지고 그 위에 외벽은 자연석으로 고루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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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쪽 끝의 산봉을 기점으로 하여 북동쪽으로 닫는 산등성의 외측(外側)을 돌아 축성되었고, 이 능선의 남쪽 저지(低地)는 밭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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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遺構)는 대부분 폐비(廢)되어 있고, 성벽의 상태가 가장 좋은 곳은 북동쪽 끝으로, 상후(上厚) 0.6m, 내고(內高) 1.8∼3.3m, 외고(外高) 2.0∼4.3m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문의 유지(遺址)는 남서쪽 끝과 남쪽에서 당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쪽, 그리고 남동쪽의 3곳에서 확인되었다. 신라가 한강을 건너기 직전의 전진기지(前進基地)로서 전략적 ·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복원 · 정비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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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산성내에 국보제198호 신라적성비가 남아 있어서 그 시대의 시대상을 살펴 볼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비문에 지증왕 13년에 우산국을 정벌하여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이사부장군이 나와서 삼국사기의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신라적성비 국보제1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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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 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隷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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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 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도로안내]

▪ 단양읍 소재지 -> 상진대교 -> 5번국도(영주방면)-> 36번국도(충주방면)->단성면소재지->적성산성 


http://tour.dy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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