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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답사일번지] 월출산 월남사지 찍고 월출산다원 지나 무위사 극락보전

전라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8. 6. 1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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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답사일번지] 월출산 월남사지 찍고 월출산다원지나 무위사 극락전으로 

 영암에서 13번 국도를 따라 불티재를 넘어 강진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편 방향으로 월출산 계곡중에서

 가장 아름다운곳으로 꼽히는 강진군 성전 면 월남리에 있는 금릉 경포대 계곡을 만나게 된다. 

 

 13번 국도에서 벗어나 경포대방향으로 올라가다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민가들이 들어서

있으며 월남리 마을이 들어서 마을 입구 숲길 사이로 월남사지 삼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월남사지에 있는 집들의 담장을 보면 절터에서 나온 부재로 돌담을 쌓아 놓은것을 볼수가

있어서 문화재에 대한 관리에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 정도를 쉽게 알아볼수 있다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54번지 월출산 남동쪽 자락에 위치한 월남사지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시대에 진각국사(1178∼1234)가 세운 것으로 되어있지만, 경내 삼층석탑의

 규모나 양식으로 보면 그 이전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폐사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으나 무위사 사적(無爲寺 事蹟)에 의하면 정유재란 당시 이 일대의 사찰

들이 모두 병화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무위사만 홀로 남았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유재란때 소실되고 폐찰이

 된 뒤에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인근에 있는  현재 금당지(金堂地)로 보인 곳(832번지)에는 건물초석과 기단으로 보이는 축대가

 남아 있으며 또 마을 어귀의 돌담장 근처에서 옛기와편을 비롯하여 청자·백자편은 물론 탑재로 쓰인

장방형의 판석들이 발견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는 2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삼층석탑 근처 민가에서 석탑의 지붕돌인

옥개석이 발견되었는데, 발견된 지붕돌의 세부기법이 월남사터에 있는 백제계 양식인 삼층석탑과는 다른

 신라계 양식의 기법이라는 점이다.

한 절터에서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양식의 석탑이 함께 자리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보물 제298호인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진각국사(1178∼1234)가 창건하였다는 기록대로라면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삼층석탑의 조성시기 또한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석탑의 거대한 규모나 부여정림사지

석탑계의 백제계탑들이 고려초반기에서부터 출현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진각국사가 창건하였다는

기록은 당시 월남사의 중창일 가능성이 있으며 오히려 최초의 창건은 이 보다 더 연대를 올려 잡아야

 되지 않을까 한다.


삼층석탑 근처에 진각국사를 기리기 위해서 세운 진각국사비는 비석의 위쪽이 깨져 없어졌고, 앞면

일부도 떨어졌으나 남아있는 바닥돌과 거북의 기세, 비석의 폭으로 보아 매우 웅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금당터 초석, 축대가 남아있으며, 옛 기와, 청자, 백자조각이 츨토되고 있다

 

월남사지에서 큰길로 나오지 않고 월출산 남쪽 기슭을 따라 나 도로를 따라 무이사를 찾아가다보면 시원

하게 펼쳐진 녹차밭을 만나게된다.

  

 

이곳은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733번지에 자리한 태평양 설록차 월출산다원(061-432-5500)으로 월출산

 남쪽 기슭 10만평을 개간하여 다산 정약용선생이 천하에서 두 번째로 좋은차라고 칭찬했다는 월출산

녹차를 생산하고 있다.

월출산다원은 뒤로 우뚝솟은 월출산의 기암절경과 어우어져 보성다원과 제주도 오설록하고는 또다른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수 있는 곳이다.

 

 월출산다원에서 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번지 월출산 남쪽에 위치한 무이사는

 강진에서 현존하는 오래된 사찰이자 아름다운 극락전을 보유한 우리 조상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무위사 창건과 사찰명에 대한 여러이갸기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 왔다는 내용이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확인되고있다.

 

 고려초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였다

이는 교종이 주류였던 신라의 법체계와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용하고자 하는 승풍이 강한

 선종 계통의 9산선문의 정신을 새로 세운 나라의 정책으로 받아들여서 사찰이 한지역의 중심에서 종교적인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미술 등 문화 대중 활동과 더불어 정치적 역할을 하게 만든 고려건국초기의

 사회현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려 초기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고 정앙정부 차원에서 통합된 후백제 지역에 대한 안정을 도모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책적 차원의 활동과 함께 지방민들을 교화하고 새로운 질서에 편입

하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는 역할도 사찰이 함께 한 것이다.

무위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은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조선초기의 목조건축물인 무위사 극락보전이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번째 중건인 서기1555년에 태감선사에 의해 건립된 것이나 1983년

 극락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혀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에 건립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무위사 극락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주심포계(柱心包系)에 맞배지붕을 얹은 단층 겹처마집으로 건물

 내부의 구조는 이중량(二重樑)으로 되어 있으나 건물 밖에서 보면 이중량 구조로 보이지 않고 두 고주(高柱)

 위에 중종보[中宗樑]만 걸쳐 있고, 그밖에 창방(昌枋)이나 장여 등 작은 직선재(直線材)로 측면을 간결하게

 구성하고 있다.

건물 앞면은 좌·우칸이 중앙칸보다 조금 넓게 되어 있고 격자 모양과 빗살 모양을 섞어 만든 사분합문

(四分閤門)을 달았으며,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을, 뒷면에는 칸마다 모두 판자문과 창을 달았다.

기단은 양 옆면과 뒷면의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앞면만을 높게 쌓았는데, 엇맞추어 쌓은 석단(石壇)에

 갑석(甲石)만을 둘렀으며 그위에 주춧돌을 놓았다.

 기둥자리[柱座] 둘레를 쇠시리(몰딩)하지 않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웠고 기둥 위에 포작(공포를

 짜 맞추는 일)을 하였다.

극락전 건물 안에는 뒤쪽 중앙부에 불단을 두어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을 봉안했고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와 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진 유명한 수월관음벽화 등의 탱화가 있고 측면벽의

 벽화들은 해체·보수 때 벽체로 뜯어내어 따로 보존하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고 천장은 위쪽 가구를 드러낸 연등천장이며 불상 위에만 보개와 우물반자를

 설치하여 독특한 면을 보인다.

이 건축물은 공포의 짜임방식이나 각 부재의 형태 등이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같은 고려

시대 건축보다 후대의 특징을 보이며 조선 초기 주심포 건축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1308년에 세워진 수덕사(修德寺) 대웅전과 가구의 방식이나 공포의 짜임이 비슷하다. 조선 후기 건축에

 비해 단순·간결한 구성을 보이며 단청의 색조도 장중하다. 그리고 건물 정면의 모습도 간살이에 비해

 기둥높이가 낮아 평활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까지 경내에 있던 목조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3호)·명부전과 요사채 뿐이었으나 1974년에 벽화보존각

(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미륵전 등을 새로 지어 18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밖에 경내에는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507호)와 종형의 옥신을 가진 사리탑,

석탑형식을 한 부도가 있고 미륵전 안에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자료참조]

http://www.gangjin.go.kr/

http://www.muwisa.com/about/index.html

http://www.sulloc.co.kr/dawon/dw_wolchol.jsp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3,01250000,36#

 

[주변 맛집]

[전남강진 맛집] 수인관 - 돼지양념연탄불고기백반

백반 한상에 2만원(4인기준/1인당 5천원꼴) 

061)432-1027  / 강진군 병영면 삼인 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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