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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에 자리잡고 소백산맥을 품에 안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경상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8. 10. 2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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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한자락인 봉황산(818m)에 자리잡은 영주 부석사는 무량수전 앞에 펼쳐진 소백산맥의 웅장함을

 품에 안아 자연속의 하나가 된듯한 형상은 우리나라 고건축물의 품격과 조상의 지혜를 말없이 대변해주고

 있는 곳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부석사는 '삼국사기'에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불법이 우리나라에 전수되어 불교가 성행 할때는 사찰은 신앙으로서만의 역할 뿐만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였었다.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고 이곳 오지에 부석사를 세웠다는 사기의 고증에서 보듯 삼국시대의 사찰도 변방

지역과 오지지역에 세워져 백성들의 구심체 역할과 함께 신도들의 공동체 형성과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치안을 확보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군사중심지의 역활도 수행하였다

이를 반증하는 설화 하나가 전래되고 있는데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울려고 하는데 인근의 흉포한 무리들이

 몰려와 위해를 가하자 의상대사가 부석사 마당에 있던 큰 바위를 하늘로 띄워 흉포한 무리들에게 압력을

 가하자 이에 놀란 무리들이 도망을 쳐서 이후 이인근은 평화로운 고을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 왼편에는 부석이라는 글이 파인 바위가 있어 이 설화를 되새겨준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

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

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

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

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

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

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무량수전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제45호)

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부석사는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 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세운 것이다.

안양루(안양문)은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

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국보 제17호인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拜禮石이 현존한다.

 부석사는 창건한 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華嚴宗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석사가 위치한 太白山은 新羅五岳 중 北岳으로 숭앙되며 비중있는 화엄종 본찰의 중심무대가 됨에 따라,
사찰

 내에는 석등 이외에 大石檀, 石龍, 長臺石, 石搭 등이 이 무렵이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다른 하나는 醉玄屢 앞의 옥개석간주석 파편 일부를 통해 알수 있다


국보 제19호인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 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국보 제46호인 조사당 벽화 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것이다. 일제 시대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상을 그린 것인데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듯하다.


벽화들은 현재 박락(물건이 오래되어 긁히고 깍이어 나감)과 개채(색을 다시 입힘)가 심하여 정확한 양식을

 살피기 어렵다. 이 벽화들의 제작 연대는 지금까지 조사당 장여 묵서명의 기록대로 1377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도리 하단에 1201년에 개채한 것을 다시 1493년에 개채하였다고 한 묵서명의 기록으로 보아 1377년

 제작설은 제고해 보아야 한다. 또한 사천왕상의 표현 기법은 [인종일채]의 선각 천부상과 같은 12세기

 작품과 비교되며, 14세기 불화의 양식보다는 유연하고 세련되었기 때문에 이들 벽화의 제작 시기는

 1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크기 : 205.0 X 75.0 센티미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

(遺物館展示館)에 보관되어 있다.


 

보물 220호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자인당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하고

 당호를 '자인당'이라고 고쳤다. 이는 부처님을 자인(慈忍)대사라고 하는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자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공포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실내에는 석조 삼존여래 좌상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보물 제220호)이다.

 이 2구의 불상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 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양감이 없는 경직된 신체와 형식화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이나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는 모두 9세기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선묘각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의상 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인물인 선묘를 모신

 건물이다. 규모도 작고 기단도 없이 초라하여 마치 작은 사찰의 산신각 같은 느낌을 준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가구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최근세의 건물인 듯하다.

 내부에는 1975년에 그린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부석사의 창건설화에 의하면

“의상 대사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669년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여 한 신도의 집에 머물렀는데 선묘

(善妙)란 처녀가 사랑을 고백해 왔다. 그러나 마음이 돌과 같이 굳은 불심을 가진 의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 선묘낭자는 그 앞에서 대원(大願)을 발하여 말하길, ‘내세에 태어나 스님께 귀명하고 대승을

 배우고 익혀 대사를 성취하리다. 제자는 반드시 신도가 되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공급하리다.' 라고 하였다.

의상은 장안(長安)의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지엄 삼장(智嚴三藏) 밑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대사는

 극히 미묘한 도리를 이해하고, 전체의 흐름을 알고 그 행함에 절도가 있고, 요령이 있어 덕의 그릇에

 가득 찼다고 할 수가 있고, 가히 삼장의 바다에 기꺼이 노닌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리하여 귀국 날짜를 정하고 등주에 있는 신도 집에 다시 들렀다. 대사는 수년에 걸친 뒷바라지에

 감사를 표하고 상선을 타고 귀국하게 되었다. 뒤늦게 대사의 출발을 알게 된 선묘는 대사에게 드릴

 법복과 여러 가지 집기를 들고 해안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대사가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멀리 가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를 올려,‘내 본래의 참뜻은 법사

를 공양하는 데 있습니다. 원컨대 이 의복을 담은 함이 저 배에 날아 들어가기를 기원합니다.' 라고 하며

 파도 위로 함을 던졌다.

때 마침 거센 질풍이 불더니 함은 새털같이 날라 배 위에 떨어졌다. 선묘는 다시 맹세하기를,‘이 몸이 큰

 용(龍)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대사님이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한 원력은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마침내 그녀의 몸은 용이 되어

 혹은 약동하고 혹은 굽이치면서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나갔다.

의상은 본국에 되돌아온 후 산천을 두루 찾아 고구려와 백제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았다. 마침내 그곳을 찾았으나 이미 삿된 무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스님은 혼자 생각

하기를,‘여기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된 법륜을 돌릴 만한 곳이다. 권종이부의 잡귀

 무리들이 오백명씩이나 모여있을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하였다.

의상은 마음 속 깊이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 때 의상을 항상 따라다니며 지키던 선묘룡(善妙龍)은 대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허공에서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와 깊이가 1리쯤 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의 정상을 덮고 막 떨어질

 듯 말 듯 하니 많은 잡귀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사는 절 안에 들어가 『화엄경』을 펴기 시작하였다. 겨울에는 햇빛이 있는 낮에,

 여름에는 서늘한 저녁에 강설을 하여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부석이라는 절 이름은 가람이 들어설 터에 잡귀들이 패악을 부리며 방해하자, 대사를 흠모하다가 용으로

 변한 선묘가 다시 커다란 돌로 화하여 이들을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선묘의 화신이라고 전한다. 의상 대사를 한 인간으로 연모한 당나라 처녀

선묘의 애틋한 마음이 영원히 깃든 이름이다.


 

[관련자료]

http://tour.yeongju.go.kr/

http://www.pusoksa.org/

http://www.cha.go.kr


[주변 맛집]

<풍기 정 도너츠> 인삼도너츠, 생강도너츠 - 30년 전통

경북 영주시 풍기읍 동부6리 418-16 / 054-636-0067

 

< 코리아나 식당 >백반(5,000원)

경북 영주시 부석면 소천1리 387-15 / 054-635-4220, 054-633-5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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