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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보다 3년 먼저 조성된 큰절 천년고찰 봉화 축서사

경상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8. 11. 17.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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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의 한자락을 지키고 있는 문수산(1205m)자락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1번지에

 자리한 축서사를 찾게 된것은 2008년10월30일 봉화군 초청으로 관광설명회를 겸한 블로그기자단 팸투어의

 일정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는 축서사라는 절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들은 적도 없었기에 팸투어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축서사를 찾아 갈일은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이번 팸투어를 통해 봉화 축서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의상조사가 부석사를 세우기 3년전에 이곳

 축서사를 먼저 창건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수산 자락 명당터에 자리잡은 축서사 경내에 들어선 순간 첩첩 산중 준령에 자리잡고 있는 이터가

 주는 편안하고 깨끗한 기운에 여행의 피로가 가시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축서사란 이름은 독수리 축(鷲,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던 영축산을 본따 ‘축’으로 읽는데, ‘취’라고도

 읽음), 깃들 서(棲), 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님을 뜻하므로 축서사란 이름을 붙인 듯 하다. 한편 풍수지리학상으로 축서사가 자리 잡은

 곳이 독수리 형국의 명당이므로 축서사라 명명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축서사에 올라서서 산아래를 내려다보면 태백의 연봉들이 첩첩히 쌓여 있는 것이 바라다 보여 이곳이 얼마나

 깊은 산중이고 명당터인지를 한눈에 바라볼수가 있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 666년)에 의상 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어느 날 밤 지금의 개단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이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고

 축서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 해서 문수산이라고 한듯 하다.
3년 뒤에 의상대사께서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이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 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축서사를 들어서면 제일먼저 보이는 조성물이 5층석탑인데 이 석탑 탑신부 1층 왼편에 말벌집이 탑을 의지하고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살생을 하지말라는 부처님법에 따라 말벌집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인지 경내 한가운데에 말벌집이 함께 살고

 있는 신기한 모습에 절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 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 보광전, 약사전, 선승당,

 동별당, 서별당, 청련당, 백화당, 범종각 등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상대, 도솔암,

 천수암 등 세개나 되었고, 대중이 44명이 살았으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 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 1905년)과 정미 7조약(서기 1907년)으로 우리나라가 왜구의 속국화

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할 때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축서사도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 되어  천년 고찰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축서사는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되었고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수많은 유물이 사라져버린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

이기도 한 곳이다.

그 후 한동안 폐사로 있다가 일제 말기에 삼성각과 6.25전쟁 직후에 요사 1동을 신축하여 사찰의 체모를 유지

하다 최근에 서기 1980년 전후에 요사 1동과 토굴 2동을 신축하였다.

대웅전(지금의 보광전)에 모셔진 보물제995호로 지정된 봉화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奉化鷲棲寺石佛坐像附光背)

 석조비로자나불은 보광전 서벽에 봉안되어있지만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커다란 육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가는 눈, 활형의 눈썹,

 일자로 다문 입과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어 다소 형식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주름은 다른 불상들의 U자형과는 달리 물결무늬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함께 9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좌(臺座)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8각으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하대에는 각 면에 사자

 1구씩을 새겼고, 중대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상을, 상대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비로자나불상 가운데 하나로 대구 동화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 각연사 비로자나불상(보물 433호)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어 당시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알 수 있다.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반에 만들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불상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칠해져 있었으나, 서기 1950년대 항공 스님이 흰색으로 칠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상 뒤에는 정기유(正己酉)라는 연대가 보이는데 불상을 보수했던 연대로 추정된다. 이 연대가 조선 영조

 5년(서기 1729년)인 것으로 볼 때 200여년 전에 보수가 된 것 같다. 대좌(台座)는 신라하대에 유행한 8각

 대좌로서 상중하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대석에는 8각에 사자 1구씩을 양각했고, 중대에는 공양상 및

 합장한 인물상, 상대에는 화문(花紋), 연화문(蓮花紋) 등이 조각되어 있다.

 


[자료 참조]

http://www.chooksersa.org

http://tour.bonghwa.go.kr/

http://www.cha.go.kr/



[봉화 맛집]


<용두식당> 송이돌솥밥, 능이돌솥밥

           경북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470-3  / 054-673-3144


<솔봉이> 송이돌솥밥 15,000원

              경북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232-11 / 054-673-1090


<돌집식당> 오전약수닭백숙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58번지  / 054-673-8119


[봉화 숙소]


<권진사댁> 성암고택 - 고택체험(민박)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3리 233번지 / 054-672-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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