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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27층 높이의 구층목탑(82m)이 있었던 경주 황룡사지

충청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9. 2. 1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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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고 있다면 세계 최고 최대의 목조건축물로 우리나라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였을 구층목탑이 있었던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에 위치하고 사적제6호로 지정된 황룡사지(皇龍寺址)는 553년(진흥왕 14) 월성(月

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569년 법당이 완성되었으며 솔거가 법당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날아가던 새가 살아있는 나무인줄 알고 나뭇

가지에 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645년(선덕

여왕 14)에는 목탑을 세움으로서 조성에서 완성까지 100년 가까운 93년이 걸린 신라 최대의 국가사업이었다.

 신라의 3가지 보물로 일컬어지는 천사옥대, 황룡사 9층목탑, 황룡사 장육존상 중 두가지가 황룡사에 있는 것

만 보아도 신라에서 국가사찰로서의 황룡사의 비중을 알수가 있다.

 

 

 

장륙존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인도

의 아소카 왕이 석가삼존불을 조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 3만 분과 황철 5만 7,000근, 석가

삼존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서 장륙존상이 조성되기를 축원했는데 경주에

 이르러 574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한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미륵장육상>

이때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한다. 이 황룡사장륙상은 이듬해 왕이 돌아갈 것을 미리 알고는 눈물을 발꿈치까지 흘려

땅을 1척이나 적셨다고 하는 설화가 전한다.

이 불상은 1238년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두 다리와 신광(身光)을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로 보아 삼존불입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장륙상은 1장(丈)

6척(尺)이므로 보통 사람 키의 2배가 넘는 5m 정도의 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록에서 인도의

아소카 왕이 상의 모본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황룡사금동상이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이국적인

불상양식을 반영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룡사구층목탑은〈삼국유사〉권3 황룡사구층탑조와 〈찰주본기 刹柱本記〉에 의하면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

율사가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여 구한이 와서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다“라고

 선덕여왕께 청하여 구층탑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의 명공 아비지가 목재와 석재로써 건축하고,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으며, 자장은

 부처사리 100과 를 탑 속에 봉안해 645년에 탑을 완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황룡사구층목탑의 높이는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 82m에 달한다고 전해지는데

오늘 건축물로 비교해 보면 27층 아파트 높이 정도의 탑이 서라벌(경주)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 모습은 얼마나 웅장했을지는 가히 짐작이 간다.

황룡사 9층목탑을 보고 지은 고려시대의 시를 보면 마치 눈으로 보는듯한 착각이 일정도로 황룡사구층목탑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層梯繞欲飛空 (층제요욕비공) 층계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르는 듯

萬水千山一望通 (만수천산일망통) 수많은 하천과 산들이 한눈에 보이네

俯視東都何限戶 (부시동도하한호) 굽어보니 옛 도읍지의 수많은 집들이

蜂?蟻穴轉溟 (봉과의혈전명) 벌집 같고 개미굴 같아 아득하기만 하네

- 김극기(문장가), 김거사집에서-

 

 

황룡사구층탑은 불력(佛力)으로 이웃나라의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킨다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濊貊)에 대항하는 것을 상징한다.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웃의 침해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스님이 지은 시에서도 황룡사 구층목탑의 호국의지는 잘표현되어 있다.

鬼拱神扶壓帝京 (귀공신부압제경) 귀신들의 도움 받아 서울 땅을 진압하고

輝煌金碧動飛 ? (휘황금벽동비맹) 휘황찬란한 색깔 속에 용마루는 나는 듯

登臨何? 九韓伏 (등임하시구한복) 올라보니 어찌 변방 나라 복종으로만 그치랴

始覺乾坤特地平 (시각건곤특지평) 비로소 온 천하의 태평한 이유 알겠네


이 목탑은 718년(성덕왕 17)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868, 872, 1012, 1022, 1064년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1360년전에 완공한 황룡사 구층목탑은 그기술과 과학적 원리가 아직 규명되지 못해서 현존

하는 기술로 지어진 목탑중 진천보탑사에 있는 52m 높이의 3층목탑이 유일한 실정이다.

진천 보탑사 3층목탑은 신영훈한옥문화원 원장, 조희환 도편수, 태창건축 박태수 소장,  심용식 소목장, 최교준

 야철장,  이진형 조각장,  한석성 화사, 이화여대 조정현 교수, 김영일 가산건설회장 등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조성한 건축물이다.

경주시와 문화재연구소가 6년간 그비밀을 연구하여 2017년에는 황룡사 구층목탑을 복원한다고 하니 천년전의

 우리조상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수가 있다.  

 

                                                      <2007년 음각형태의 유리소재로 복원된 경주타워>

〈삼국유사〉 권4 황룡사종(皇龍寺鐘)조에 보면 754년(경덕왕 13) 구리 49만 7,581근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었다고 하나 이 종도 역시 몽골 침입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황룡사지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얼굴 부분만 남아 있는 신라시대 금동보살상은(머리높이

 8.3cm/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하며 도금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머리에는 삼산관

(三山冠)을 쓰고 있고 얼굴은 둥글고 통통한 편으로 아래로 내려뜬 눈, 작게 표현된 입과 함께 미소를 띠고

있어 부드러운 인상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오른쪽 뺨에는 손가락을 댔던 흔적이 남아 있어 원래는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 뒷면에는 두광을 꽂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돌기가 나와 있다.

이 보살 머리에 보이는 삼산관 형태의 보관이나 양감 있고 미소를 띤 얼굴 표정 등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

사유상이나 경주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의 반가상과 양식적으로 공통점이 발견되므로 그 제작연대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황룡사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절로 신라 불교수용 초기에 지은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왕실사찰이었다.

황룡사에서는 자장, 원효 등 신라 최고의 고승들이 설법하고 진흥, 진평, 선덕, 헌강, 진성의 제왕이 친 히

 설법을 듣던 곳이다.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1969년 7월 이곳 강당지를 발굴조사하여 금당, 강당, 탑지의 초석을 발굴했고, 1976년 3월 부터 8년간의 발굴

 작업에서 독특한 가람배치인 일탑 삼금당식으로 밝혀졌으며, 금동불입상(높이 10㎝)을 비롯하여 풍탁(風鐸)

·금동귀걸이·동경(銅鏡)·와전(瓦塼)·치미(鴟尾 : 높이 182㎝) 등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단을 비롯한 건물 하부구조는 확인되었으나 상부가구재는 정확히 고 증되지 않아 전체적인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단부만 복원하였다. 발굴된 터에서 나타난 사찰의 면적은  불국사의 8배나 될정도여서 황룡사가 얼마나

 대단한 사찰이었는지 규모만 가지고도 알수가 있다.


[관련자료]

http://enc.daum.net/

http://korean.visitkorea.or.kr/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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