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국보 제9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충청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10. 9. 11. 07:00

본문

728x90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국보 제9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국보 제9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일층탑신에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백제 성왕은 538년 봄에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궁과 관청을 비롯하여 사비도성 안을 중앙 동 ·서 ·남 ·북 등 5부로 가르고 그 안에 거주민을 조성하는 도시계획과 더불어 사찰이 건립되었습니다. 백제가 사비성으로 천도하던 시기의 도성의 모습이 중국 사서「주서(周書)」백제전에는 절과 탑이 매우 많다(寺塔甚多)" 라고 적혀있다.

 

사비성 도읍기의 사찰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찰은 단연 정림사지이다. 게다가 정림사지는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 구간 내에서도 중심지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정림사지가 사비도성을 조성할 때 일정한 계획 하에 조영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림사지와 왕궁과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 낙양성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와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정림사지 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있는데, 이것은 백제 왕실 내지는 국가의 명운과 직결된 상징성의 공간으로 정림사지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는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인 백제 전형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이 가람 배치 구조는 고대 일본 가람조영의 모태가 되어 백제와 동일한 일본의 사천왕사(시텐노지. 四天王寺) 양식을 낳았다.

 

 

정림사지는 복도가 건물을 감싸는 배치 형태이다.

하지만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이 아닌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입니다. 또한 중문 바깥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최고(最古) 연못이며 이러한 연못의 존재는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도 정림사지는 금당의 이중기단, 강당지 및 회랑지의 와적기단, 석탑부의 판축기법등 고대 가람의 특별한 형식을 보여주어 백제 건축의 사료적 의의를 갖는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