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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동안 전해온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전설에 의문을 제기한 익산 미륵사지석탑

전라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12. 2. 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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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동안 전해온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전설에 의문을 제기한 익산 미륵사지석탑

익산시 미륵산(430m)자락에 목탑양식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 되는 익산미륵사지 석탑를 품고 있는 미륵사지는 삼국유사에 '미륵사는 서동요를 지어 선화공주와 결혼한 마를 팔던 아이인 서동(백제 무왕)과 왕비 선화 공주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미륵산) 아래 건립됐다'고 전해왔다

 

 

그런데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을 하나씩 해체하여 복원하려는 과정중에 석탑 제일 아래 1층 심주석 십자형 중앙에서 사리공에서 사리병과 금판 모양의 봉안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좌평 사택적덕의 딸 출신인 백제인 왕비가 건립을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선화공주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백제 최대의 절터 였던 미륵사지는 황룡사 구층목탑에 버금가는 50M 높이의 중앙목탑을 중심으로 좌우에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형태인 동탑과 서탑이라고 불리는 미륵사지석탑이 세워진 절터이기에 나머지 두곳의 봉안기에 이에 준하는 자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선화공주의 실체에 대해선 단정 지을수는 없을 것이라 본다.

 

 

보석의 도시 익산은 나중에 무왕이 되었던 서동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무왕의 신라를 향한 남진정책과 관련하여 왕궁과 함께 지어진 미륵사는 왕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서탑을 기준으로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이 남아 있는 절터이다.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6층까지만 남아 있어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지만 목탑에서 석탑으로 탑건축 양식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탑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의 석탑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재위: 600년 ~ 641년)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로 향하고 있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하여 못을 메우고 목탑과 동양최대인 두 개의 석탑과 미륵삼회전, 낭무의 건물을 638년에 봉안하고 미륵사라 칭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세워진 혜거국사 비문에 922년에 혜거국사가 미륵사탑을 개탑했다는 기록이 전해오는 미륵사지는 954년 미선사로 사명이 개명되었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의 명문에는 980년, 1267년, 1317년, 1330년의 기록이 발견되고 조선시대인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양곡집에 미륵사지석탑이 나타나고 있어 오랜세월 그 자리를 지켜왔음을 알수 있다.

 

 

미륵사지가 언제 절터가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전해오는 바가 없지만 17세기 이전에 미륵사지석탑이 벼락을 맞고 무너졌다는 기록이 와유록에 전해온다.

 

 

황량한터에 무너져 가는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아 있던 미륵사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학자들이 1910년 고적조사를 개시로 유물을 조사하고 920년에 석탑에 시멘트를 발라 복원을 함으로서 흉물스러워져 세인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연구소에서 백제 문화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15년동안 진행되어 문자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하여·불상 등 2만여 점의 각종 유물이 발굴되어 석탑 해체 복원에 이르게 되었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 해체 과정에서 1층에서 발견된 봉안기에 함께 발결된 사리병에는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어 백제공예품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블로그 포스팅 : 여행블로거 / 맛집블로거 / 대한민국 대표여행지 1000 여행작가(도서출판 넥서스) - 강경원의여행만들기 (대화명: 마패)

 

익산 미륵사지

지정번호 사적 제제150호호(1966년 6월 22일 지정)

소재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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