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발에 발견된 적성산성 신라적성비 고대역사를 풀어가는 퍼즐 조각 단양 보물여행
1978년의 새해 초 남한강가에 축성된 단양 적성산성에서 학술조사를 벌이던 단국대학교 학술조사팀중 한사람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려고 튀어나온 돌을 쳐다본 순간 “대(大)”라고 새겨진 글자를 보고 눈이 고정되었다.
글자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돌주변 흙을 파내려 갔는데 조각난 돌비석이지만 진흥왕 시절 죽령을 넘어 북으로 진출하던 신라의 기록이 담긴 신라적성비가 발견되어 그 가치와 역사적 희소성이 인정 받아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적성비의 전체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연월일을 기록한 부분은 비롯해 일부가 파손되어 있고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학자들에 의해 거의 판독되어 내용이 공개 되었다.
신라적성비문에 '국법', '적성전사법' 등의 용어와 소녀 소자 등의 구분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를 근거로 신라 국가율령제의 내용과 함께 적성지방의 토지 또는 수취에 대한 법률의 존재와 신라가 일정한 기준하에 인구를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추론할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예서와 해서의 중간 과정의 서체로 율동적인 필법으로 조각된 신라적성비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어 신라가 정성을 들려 세웠음을 알수 있다.
비문에 신라 진흥왕이 남한강상류지역인 적성(단양)지역을 점령한뒤 고을 세운 지역민들과 장군들에 논공행상을 하여 포상을 주고 인재로 등용함으로써 점령지역의 민심을 수습하는 내용이 표현되어 있어 신라가 점령지역에 대한 민심수습 방안을 들여다 볼수 있다.
신라적성비에는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노래에 등장하는 신라장군 이사부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대아찬 비차부, 가 표기되어 있고 신라 국사를 편찬하고 북박공략을 중도한 거칠부로 추론되는 명칭이 있어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에 나오는 “진흥왕 12년 거칠부와 대아찬(17관등 중 5관등) 비차부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 죽령 바깥쪽 고현 안쪽의 10군을 빼앗았다”내용을 고증해 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신라와 고구려가 밀고 밀리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성재산에 축성된 적성산성에 올라서면 중앙고속도로의 큰줄기가 남한강을 따라 달리는 모습을 볼수 있어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지역임을 알수 가 있다.
적성산성은 신라가 한강을 건너기 직전의 전진기지로 전략적 정치적으로 신성봉 아래 세워진 고구려 온달산성과 대비되는 산성이다.
사적 제265호로 지정된 단양적성산성은 신라 진흥왕때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 뒤편에 자리잡은 성재산을 빙둘러 축성된 길이 932m의 석성이다.
성내에서는 신라 및 백제계의 토기편, 고려조의 청자편과 와편이 발견되어 당시의 시대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멀리서 봐도 그 규모와 높이가 짐작되는 거대한 성벽을 언제 오르나 싶어 주춤하게 되지만, 산성의참모습을 체험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올라볼 것을 권유한다. 활처럼 휘어진 산성 위에서 바라보는 발아래 풍경은 다리품을 팔아가며 고생스럽게 오른 보람을 한 번에 안겨줄 만큼 멋진 절경을 자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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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단양여행
적성산성 신라적성비 국보 제198호
주소 |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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