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축제가 열리는 김제의 동남쪽에 해발 793m로 우뚝 솟았있는 모악산은 높고 큰 산을 뜻하는 '엄뫼'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지는데 금산사지(金山寺誌)에는 '엄뫼'를 어머니 산이라는 뜻으로 의역해서 '모악(母岳)'이라 적었다고 했다.
모악산 꼭대기에 흡사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모습 같은 큰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라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떤 이는 모악산이 한반도의 자궁 자리에 해당한다고 해석한다.삼국시대 이전부터 관개시설의 대명사로 꼽혀 온
벽골제의 물도 그 근원을 모악산에 두고 있다.
이 모악산의 중심에 미륵성지로 유명한 천년대찰 금산사가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고 금산사의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통일신라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미륵신앙의 성지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진표율사의 출가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있는데 진표율사가 출생한 곳은 완산주 벽골군 두내산현 대정리
로서 지금의 김제지역이다. 그의 가계는 향리에서 대대로 사냥을 하면서 살았으며, 진표율사는 날쌔고 민첩했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한다.
어느 날 진표는 사냥을 나가서 짐승을 쫓다가 잠시 밭두덕에서 쉬었다. 그때 개구리가 많은 것을 보고 그는 그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꿰미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해 물 속에 담가
두었다.그러나 사냥을 하던 그가 집으로 갈 때는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그 개구리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듬해
봄 진표는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물 속에서 30여마리의 개구리가 꿰미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었던
것을 보았고, 그제서야 그는 지난 해의 그 일이 생각났다. 그는 잊어버리고 1년을 지났는데 입을 꿰매인 개구리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곧 그 개구리를 풀어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는 출가의 뜻을 품게 되고 마침내 깊은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진표율사와 더불어 금산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역사적인 인물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다. 금산사매표소를 지나
금산사로 올라가다보면 길오른편에 견훤이 축성했다고 전해져 오는 성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후백제를 건국하고(900년) 완산군(完山郡), 즉 지금의 전주(全州)에 도읍을 정한 견훤이 935년 3월 네째 왕자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첫째 왕자인 신검이 동생들과 반란을 일으켜 견훤을 막내 능예왕자와 함께 금산사
에 유폐시켰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그의 금산사 탈주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견훤이 유폐된 곳은 금산사 미륵전 마루로 통해서
들어가는 2∼3평 남짓한 공간인데 견훤은 술을 빚어 수졸 30인에게 마시게 하여 그들이 취해 떨어지게 하고 이곳
을 빠져 나와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투항 하여 상보(尙父) 칭호와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
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켰다.
[삼국유사]에는 견훤의 출생에 관한 설화(구인생(蚓生)설화)가 실려있는데, 옛날 광주(光州) 북촌(北村)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에게 아뢰기를 밤마다 자색(紫色)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였다.아버지가 그 남자
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고 일러서 딸이 그 말대로 했는데, 이튿날 아침 실을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서
실끄트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얼마 후부터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국보 제62호인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이 보인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
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
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 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상의 훌륭한 유산에 수많은 몰지각한 사람들이 낙서를 해놓아서 이곳을 찾는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얼마나 낙서가 심한지 외벽벽화 아래에는 “낙서를 금합니다. 문화재가 아파요”라는 표지판까지 세워놓았을까
싶으니 못난 후손들을 둔 조상님들에게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은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 금산사)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石壇, 방등계단)을 감싸 도는구나.
낡은 짐대「幢」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
초제(招提, 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
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
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
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는 보물 제27호로 지정된 육각다층석탑이 있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
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고려시대의 조성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된 노주
(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
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
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대장전 앞에는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오면서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
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
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장륙상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
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보물 제827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잡고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
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
(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
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
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자료참조]
[주변 맛집]
<참밀드림> 오디, 뽕잎 찐빵 -3,000원 / 뽕잎 만두 -3,000원
전북 김제시 금구면 낙성리 454-3 / 063-547-5005
<곰돌이네> 시래기민물새우가 나오는 백반 5,000원
전북 김제시 요촌동 373-36 / 063-546-1238
해남 갈두산 사자봉 땅끝 전망대 일몰(석양,낙조) (0) | 2008.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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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들도 쉬어간다는 편안한 터 김제 모악산 귀신사 (0) | 2008.11.30 |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한옥마을의 상징인 어용전인 경기전 (0) | 2008.11.25 |
파도와 어울어져 더 아름다운 부안 변산 채석강과 격포일몰(낙조) (0) | 2008.11.23 |
400년 된 단풍나무가 하늘을 덮고 있는 천년고찰 고창 청량산 문수사 (0) | 2008.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