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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자락에 자리잡은 항일불교 임제선의 본거지 증심사

전라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9. 2. 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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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의 동쪽을 에워싸고 솟은 무등산의 서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증심사(證心寺)는

 헌인왕4년(860) 철감국사가 창건하였고,고려 때 혜조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조선 세종때

 김방(金倣)이 중창 하였는데,이때 오백나한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광주 동구  운림동 56번지에 위치한 증심사는 비록 한국동란 때 원형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광주지역의 대표적 사찰로 손꼽힐 만하다. 무등산이라는 빼어난 산세의 중심에 있을뿐더러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호남의 빼어난 명승으로 꼽았 으며 「광주읍지」 등에도 무등산의

 정기를 함축하고 있는 곳이라고 찬탄 하였다.

지금의 건물들은 1971년에 중창된 것이 대부분이다. 역사성을 고려하여 증심사 일원은 모두

 광주광역시 문화재 1호로 지정된 바 있다.

터가 반듯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사진 땅에 석축을 쌓고 그 몇 개의 단으로 나누어진 곳에 여러

 건물들을 배치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내선일치(內鮮一致)라는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한­일 불교 의 공동

원류설을 일제가 퍼뜨릴때 만해 한용운 등은 한국과 일본 불교의 뿌리는 전혀 다르다는 논지를

 폈다. 즉 일본의 경우 염불종, 조동종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신도(神道)와의 융합이 이루어진

 반면, 한국은 임제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이 주류였다는 주장이다. 그때 임제종 운동을

펼친 본거지가 바로  증심사였다.


 

증심사의 오백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은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 (동구)로 지정된 증심사

삼층석탑(證心寺三層石塔)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에 가늘고 긴 안상(眼象)이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위층 기단에는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 한 돌씩이다.

층마다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몸돌이 위로 오를수록 알맞게 줄어들어

 안정감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으로, 통일신라 후기∼ 고려 전기 즈음에

 주로 나타나는 양식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

돌위로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만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33년 탑을 수리할 때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1950년 한국전쟁 당시 망실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탑의 중심에서 칠(漆)상자가 나왔다. 그 안에는 금동

석가 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이 있었다. 그밖에도 철제 오층탑,철제 불상 2 구,수정,옥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석가상과 보살상은 매우 뛰어 난 형태여서 각각 국보로 지정

되었다고 한다. 이 불보살상 2구는 한국 전쟁 직전에 문화재 보호를 위해 광주경찰서로

 이관되어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곧이어 전쟁이 터지고 혼란이 가중되던 즈음 행방불명된

 상태 이다.


 

증심사 비로전에 모셔진 보물제131호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證心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은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인데,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 폐사지에서 옮겨 왔다고도 하고,일설에는

 광산군에 있는 대황사(大皇寺)라는 절에서 옮겨왔다고도 하는데,확실하지 않다  현재 광배

(光背)와 대좌(臺座)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높고 뚜렷하다. 눈·코·입 등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어서 온화하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해준다. 전체적으로

 신체는 두꺼운 옷에 싸여 있어서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무릎 너비와 적절한 비례를

 이루고 있어서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으며 양 팔에 걸쳐진 두꺼운 옷자락은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리고 있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고,손 모습은 지권인(智券印)이다. 흔히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쥐는 형태를 말한다.

부처님의 손모습은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그것은 각 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아불인 경우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킨다

 이것은 싯다르타 태자의 선언인 「천상천 하유아독존」을 나타낸다. 또 오른손을 들고

왼손은 무릎에 얹거나 땅을 가리킨다. 이것은 석가가 성도(成道)한 직후 대지의 악마

마라(Ma ra)에게서 항복을 받았다는 상징이며 흔히 항마인(降魔印)이라고 한다 .

 이 지권인은 법계(法界)가 일심(一心)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법 이라는 용어는 다르마(Dharma),즉 현상을 가리키며 계(界)는 다투

(Dhatu),즉 존재자를 말한다. 즉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는 모든 존재,

우주를 뜻한다. 이 우주의 근원은 바로 일심 그 지극한 마음으로부터 삼라만상이 출현

한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곳의 불상은 거 꾸로 오른손 검지를 왼손이 감싸안은 모습이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우수

하게 평가되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증심사는 1951년 6· 25 전란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불타 없어졌다.1970년 이후 활발한

 복원작업을 펼쳐 지장전­비로전­적묵당 등을 새로 건립하였다. 다행히 참화를 피한 오백전이

 유일한 조선조의 건물인 셈이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3호 (동구)로 지정된 증심사오백전(證心寺五百殿)은 대웅전의 뒤편에 세워진

 법당으로,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상을 모시고 있으며 이 고장 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양식이다.

조선시대에 오백전이 지어진 절은 전남지방에서는 증심사가 유일한 것이어서 더욱 귀중하다.

증심사 오백전 건축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전해져온다.

 

 

[광주 시내에서 증심사에 가려면 학동에 있는 홍림교(洪林橋)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광주사람들에게 ‘배고픈 다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이 근처를 ‘선거리’라고

 부른다.

조선 세종대왕 시절, 광주에 김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가뭄이 잦아 고을사람들이 흉년에

 시달렸다. 김방은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기어 당시로서는 큰 공사인 방죽 축조공사를 벌였다.

큰 못을 파서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고이게 하여 농사에 쓰고자 하였다.

그러나 2년에 걸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방죽을 만들었으나 그해부터 3년간 계속 가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이를 괴로워한 김방은 사흘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고 하늘을

 우러러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였다.

기우제를 마친 날 밤, 김방의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증심사를 중건하여 오백전을 짓고 거기에

 오백나한을 봉안하라’는 분부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에 김방은 서둘러 오백나한을 조성하고

증심사 중건에 나섰는데 이 일에 부정을 탈까 염려하여 스스로 육식을 금하고 손수 공사현장에서

 일꾼들을 격려하였다. 일을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나자 김방의 건강은 점차 나빠지고 과로로 인하여

 몸은 여위어 갔다.

온 고을 사람들이 김방의 지성에 감복하며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여러 집에서 매일 닭을 잡아다가

 김방에게 먹기를 권하였다. 김방은 백성들의 간절한 권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닭똥집 몇점만을

 먹고 나머지는 일꾼들에게 고루 먹게 하였다. 이러한 김방의 노력으로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궁중에서 낮잠을 자던 세종대왕의 꿈에 난데없이 광주에서 왔다는 수백마리의 닭들이

 엎드려 아뢰기를 ‘어지신 임금이시여. 광주 땅에 김방이라는 자가 있는데 무등산 골짜기에 수천

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역적모의를 하고 힘을 얻기 위하여 우리 닭들을

수백마리씩이나 죽이고 있으니 임금께서는 이 축생들에게도 자애를 베푸시어 김방을 잡아 죽여

주옵소서.’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깨어난 세종대왕은 지체없이 금부도사를 불러 3일 안으로 김방을 잡아올 것을 명령

하였다. 금부도사가 이끄는 군졸들은 밤낮으로 말을 달려 광주에 이르러 곧바로 무등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런데 홍림교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말들의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괴한 일에 당황한 군졸들이 말에서 내리려 하였으나 말등에서 몸이 떨어지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편 닭들의 꿈을 꾼 세종대왕은 이상하게 여기며 그날 밤 침상에 들었는데, 어렴풋이 잠이

 든 순간 어린 사미승 수백명이 꿈에 나타나 ‘대왕께 아뢰옵니다. 어찌 영민하신 대왕께서

 미미한 닭들의 참소를 들으시나이까. 김방이 매일 닭의 내장을 먹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방은

 일찌기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를 중수하고 광주에 방죽을 만들었으며, 다시 힘을 모아

 증심사를 중건하고 오백나한을 조성하려는 갸륵한 뜻에서 하는 일이오니 굽어살피시어 금부

도사를 곧 거두도록 분부하소서.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나라에 큰 환란이 있을 것이옵니다.’

라고 아뢰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세종대왕은 곧 명을 내려 금부도사를 돌아오도록 하였다. 금부도사 일행이

 말에서 내리지 못하고 씨름하고 있을 때 멀리서 어명이 거두어졌음을 전하고 회군을 명령

하자 비로소 말과 사람이 움직여졌다는 것이다.

이 관군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선채로 이틀 밤낮이나 꼬박 지샜으므로 이 거리를 관군이

서있었던 거리라 하여 ‘선관이’ 또는 ‘선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홍림교를 배고픈 다리라고 부르는 것도 아마도 이 관군들이 이틀 밤낮동안 굶주리고

 배고픔에 시달렸기 때문에 배고픈다리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관련자료]

http://www.jeungsimsa.org/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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