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도자기 축제 홍보를 위한 여주블로거 기자단 팸투어가 4월 11일 실시되어 도자기축제가 열리는
여주에 있는 관광지를 둘러보는 일정에 들어 있어 세종대왕릉에 참배하러 가게 되었다.
세종대왕하면 얼마전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대왕세종’때문인지 배우 김상중이 떠오르고 소헌왕후하면
배우 이윤지의 이미지가 떠오르니 이것이 바보상자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이모든것을 한방에 정리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이번 방문이기에 기대에 찬 마음을 안고 여행길
에 올랐다.
세종대왕릉 들어가는 길은 노오란 개나리가 봄을 맞이하듯 실개천(도랑)에 나란히 도열하듯 서있어 봄의 기운
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매표소를 들려 세종대왕릉에 참배하기전에 릉 왼편에 있는 진달래 동산으로 우회해서 분홍빛 진달래가 소나무
사이사이에 부끄러운듯 피어 있는 광경을 먼저 둘러 보았다.
팔뚝만한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는 사이사이에 분홍빛 진달래들이 하늘하늘 서있는 모습은
속세를 떠난듯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절로 떠오르게 만들어 주고 있엇다.
예전에는 진달래들이 더 많이 활짝 피었다고 하는데 정리를 한다고 솎아 주는 바람에 예전보다 꽃이 덜핀다는
소리를 듣고 인간의 손이 닫는 것이 망가지기 쉽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면서 지금보다 활짝 핀 진달래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면서 세종대왕릉에 참배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조선 4대임금인 세종(世宗)대왕이 영면하고 있는 영릉은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어 경기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에 자리 잡고 있다.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보』,『법화경』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이를 한글로 옮겨 30권『석보상절』이라는 귀중한 문헌을
편찬하였다.
영릉은 조선왕릉 중 최초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를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으로
1469년(예종 1)에 조성되었다.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종대왕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
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소헌왕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에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 17)에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충녕대군이 1418년
(태종 18)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敬嬪)에 진봉되었다가 세종의 즉위와 함께 공비가 되었다.
그러나 중전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다 하여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승봉(陞封)되었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심온이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아우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에게 군국의 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하는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박습이 이를 왕실에 고자질하여 심온과 심정이 모두 사사되었다. 이때 소헌왕후도 폐위
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는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과 세조가 소헌왕후의 소생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15세기를 세종대왕의 세기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이 학문의 으뜸
으로, 과학이나 기술학은 이에 비해 경시되었다. 또한 과학자들은 장인(匠人)이라 하여 명예를 누리지 못
하였고, 경제적으로도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과학기술이 국가의 근간을 다지는 중요한
발판이라고 여기고 선진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고유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15세기에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세종대왕릉 입구에는 재위시절에 만들어졌던 각종 천문이기과 과학기구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새삼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깨닫게 해준다
세종은 특히 천문에 관심을 두어 관료와 학자, 기술자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간의대(簡儀臺) 사업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었다. 1432년(세종 14)부터 7년여에 걸쳐 추진된 왕립 천문대를 건설하는 간의대
사업에는 정초, 정흠지, 정인지, 이천, 장영실, 박연 등이 참여하였다.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약 10m 높이의
노대를 만들고 돌난간을 둘러 만든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등을 부설한 대간의를 설치하였다.
매일 밤 5명의 관리가 숙직하며 천체를 관측하였고, 24절기를 확정하여 농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격루는 1434년(세종 16)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종과 징, 북이 저절로 울리면서 시간을 알려
주는 장치를 부착한 것이다. 자격루의 원리는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 구슬은 다른 쇠 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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