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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와 부도가 전해오는 부여 만수산 무량사

충청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10. 5. 2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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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와 부도가 전해오는 부여 만수산 무량사

 

초파일을 준비하기 위해 연등이 내걸린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6번지에 위치한 만수산 무량사를 찼았다. 무량사는 생육신중의 한사람이었던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진 초상화와 부도가 전해지는 특이한 사찰이다. 

 

무량마을 거쳐서 들어가면 만수산자락에 자리잡은 무량사를 만나게 되는데 청정계곡물이 흘러내리는 자연이 살아 숨쉬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김시습이 말년을 이곳에서 보낸이유를 미루어 짐작할수 있는 곳이다. 

 

무량사는 신라 말 문성왕때(839~856)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신라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대웅저을 비롯한 불전과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고 조선 인조때 진묵선사가 중수하여 그 형태가 전해져 오고 있다.

 

 

 

보물 제356호 무량사 극락전은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하나로 트여있는 그리 흔치 않는 형태의 2층 불전으로 무량사의 중심 건물이다.

주간(柱間)은 하층이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기둥을 형성하고 있고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다포식으로 18세기에 유행하던 세부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이 불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수한 건물이다.

 

보물 제1565호 부여무량사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삼존상은 아미타·관음·대세지라는 분명한 아미타삼존 도상을 보여주고 있고, 이미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玄眞)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불신의 전체적인 모습이 도식적으로 단순화된 감이 있으나 양대 전란 이후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당시 불교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량사 극락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185호 무량사5층석탑은 단층의 기단위에 세워진 높이 7.5m의 5층석탑으로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조화시켜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백제의 기법이 이어졌고 통일신라의 시대적인 양식도 계승되었다.

 

해체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무량사 법당 앞뜰 오층석탑 앞에 세워져 있는 보물 제233호 무량사 석등은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받침돌은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받침은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이 놓여 있다. 화사석은 8면 중 4면은 넓고, 4면은 좁은 형태로, 넓은 4면에 창이 뚫려 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치켜올림과 처마의 경사가 잘 어울려 경쾌한 모습을 보여 주며, 꼭대기에는 자그만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무량사 전각중에 보물 제1497호 매월당 김시습 영정에 모셔져 있는 곳이 있어 김시습과 무량사의 인연을 말해 주는 듯 하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코·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수염은 회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는 현재 몇 점 밖에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도 원본을 본 떠 그린 것이거나 덧칠을 한 것이 많은데 이 초상화는 원본 그대로 남아있어 귀중한 작품이다. 그의 저서인『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여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무량사 일주문 가기전 계곡에 놓여진 다리 건너편에 자리잡은 시도유형문화재 제25호 (부여군) 무량사김시습부도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사리를 모신 부도이다.

 

조각이 매우 우수하고 화려하다. 일제시대 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함께 넘어졌는데 그 때 밑에서 사리 1점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교·불교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매월당 김시습은 스물한살 되던해에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일이 벌어지자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머리를 깍고서 방랑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방랑길에 경주 남산, 당시 이름으로는 금오산에 은거해서 지은 것이 다섯편으로 구성된 소설 금오신화와 매월당집 23권이다(시 2,200수 포함) 금오신화는 속세의 명리를 쫓지 않고 순수한 인간 그대로를 보여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김시습이 추구하던 인간상들을 짐작할수 있는 근간이 되는 책이다.

 

 

47세 되던 해(성종 12년, 1481)에는 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다시 부인을 맞아들이기도 했으나 이듬해에 조정에서 윤씨의 폐비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리하여 유랑 끝에 다다른 곳이 이곳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이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너를 버릴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그가 지은 [김시습전]에서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지나치고 중후함은 모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도 다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고 남음이 있다"고 평가하였으니 뜻을 펼 세상을 만나지 못한 지식인의 처지를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한 듯하다.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할 때에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3년 동안 시신을 두었다가 장사를 지내려고 열어 보니 그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부처가 되었다고 하여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와서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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