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비속에 찾은 애절한 전설이 깃든 연꽃마을 제주도 하가리 연화못 여행
제주시에서 1132번 해안도로를 타고 애월항 방향으로 달리다가 자운당교차로에서 좌회전해서 고내봉 방향으로 가다보면 애절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연화못이 자리잡고 있는 하가리 연꽃마을이 나온다.
하기리마을 중앙에는 제주에서 가장 큰 3,350여평의 연화못이 있어 낚시꾼들이 즐겨찾는 낚시터이며 여름이면 적수련 연꽃이 만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하가리 연화못은 물을 이용하기 어려운 곳에서 물이 고일만한 곳을 골라 파서 빗물을 받아 물이 고이게 하고 생활 용수로 이용하는 봉천수로 제주도에서 가장 큰곳이다.
이 연화지에는 슬픈 전설이 하나 전해져 오는데 “고려왕조 25대 충렬왕(1275∼1309) 때에 마을 연하지자리에는 사형제가 주축이된 산적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마을주민들을 괴롭히고 지나는 행인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일을 자행하였다고 한다.
사형제가 힘이 장사인데가 성정이 포악해서 그소행이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했는데 신임판관이 초도순시가 있을 때 이곳을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한 산적들은 판관 일행을 습격할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시달리던 마을사람들은 "뚝할망"과 의기투합하여 야적들의 계획을 관가에 알리게 되었고 이에 관군이 출동하여 야적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뚝할망"도 야적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관가에서는 할머니의 충정심을 높이 기려 벼슬을 내리고 제주향교의 제신으로 받들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산적들이 살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허물어버리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파서 봉천수를 받아서 빨래와 소와 말이 물을 먹이는 못으로 활용하기 시작해서 17세기 중엽 대대적인 수리 공사를 하여 지금의 식용연이 있는 못은 식수로, 큰못은 우마급수 및 빨래터로 샛통은 나물을 씻는 용도로 뚝을 쌓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
연화지에 자라고 있는 연꽃들은 언제 심었는지 알수 없으나 19세기 중엽 제주목사 한응호가 지방 순시중 이 곳에 들러 연꽃잎으로 술을 빚어 마시고 시를 읊었으며 양 어머니로 하여금 연꽃을 지켜 가꾸도록 했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걸로 봐서 그이전부터 연꽃이 자라고 있었을것이다.
그후 1976년도 혹한으로 인하여 연꽃이 동사(凍死)해서 없어지고 말았으나 2년뒤 종자로 발아된 연꽃이 3포기 자라서 번식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항간에는 연꽃이 100년에 한번씩 시집을 가는데 2년 동안 자라지 않았던것은 시집을 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연화못에는 연꽃과 수련이 자라고 있으며 한때는 수련도 빨간색 꽃잎이 피는 적수련과 백색꽃이 피는 백수련, 노란꽃이 피는 황수련이 있었으나 지금은 적수련만이 자라고 있다.
현재 연화못 가운데 육각정(六角亭)이 있는데 육각정 기초공사시 뻘속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재와 기와가 발견되어 연화못의 역사를 미루어 짐작할수 있게 해준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는 고려시대 부터 화전민이 모여 살다가 조선조 태종18년(1418) 현촌 고내리에서 분리되어 가락리로 불리우다 조선조 세종30년(1448)에 윗동네를 상가락, 아랫동네를 하가락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160여가구에 45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하가리는 마을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야산에 감귤과수원이 많이 조성. 집단화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양배추 생산단지가 탁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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