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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 보물1호 흥인지문(동대문)

서울시 여행지

by 마패여행 2010. 11.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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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 보물1호 흥인지문(동대문)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동쪽 관문인 흥인지문(동대문)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방위하기 위하여 도성을 축성할 때 함께 건설된 문이다.

태조 5년(1396) 9월 건설되어 현재까지 590년 간 내려오는 동안 수차에 걸친 수축과 개축이 있었으나 그 원형만은 현재까지 보전되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들의 무관심과 무지속에 서울의 남쪽에 자리잡고 수도서울의 상징이 되었던 국보1호 숭례문(남대문)이 화마의 거센불길에 사라진 현재 흥인지문은 우리가 후손에게 기필코 물려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흥인문은 종로구에서 운영하는 서울성곽스탬프투어의 스탬프를 찍는 곳이기도 하니 우리의 것을 알고 배우기 위해서 흥인지문(동대문)을 찾아 우리것을 배우는 것도 우리의 할일이 아닐까 싶다.

 

 

 

흥인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유일하게 옹성(甕城)이 있는 성문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곡성(曲城)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으며 .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적을 방어하기에 부족한 자연조건을 인공적으로 보충하려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문을 창건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에 다시 개건하였다. 또한 단종 원년에도 흥인문의 개작이 있었다.

이 후 흥인문은 400여 년을 지내 오다가 대원군의 집정기인 고종 5년(1868)에 개건하였다. 즉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공사를 완료한 다음 광화문 밖 좌우편에 나열되어 있는 의정부, 호조, 이조, 중추부, 사헌부 등의 관아를 중수하는 동시에 흥인문을 전면 개수하였다.

 

 

흥인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이 그대로 있으나 그 기능은 옛날의 기능이 아니다.

그것은 흥인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도로를 개설하여 모든 통행을 이 도로로 하고 있으니 흥인문은 도로의 한가운데 우뚝 서서 그 위용을 자랑할 뿐이며 홍예문은 굳게 닫힌 채 파루에 문을 열어 모든 사람을 통행시키고 인정에 문을 닫아 모든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켜 수도 방위와 치안을 담당하였던 그 중대한 기능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 침략자들은 우리 민족의 혼이 서린 문화유적인 도성을 도시계획에 의하여 철거하겠다고 하여 우리 민족이 이에 항거하자 소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1907년에는 남대문 부근의 성벽을 철거하였고 융희 2년(1908) 3월부터는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동년 9월에는 서소문(소의문) 부근의 성벽 77칸과 남대문 부근의 성벽 77칸을 철거하였으며 그들의 소위 도시계획에 저촉되는 것이면 모조리 철거하였다.

 

 

이와 같이 성벽이 철거되고 성문이 개방되었고 광무 3년 5월 17일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었다.

 

그런데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수 없으나 현재는 흥인지문이다. 철종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개건하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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