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는 석가모니로 추정되는 부처님이 모셔진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
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
했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번지에 위치한 석굴암은 경주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박용우와 이보영이 주연한 일제시대를 극화한 '원스 어폰 어 타임'(윈엔터테인먼트, 정용기
감독)에서 석굴암 본존불상 이마에 박혀있었던 3000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동방의 빛'에
관련된 사건이 펼쳐지는데 소설 '천년의 빛'을 통해 알려진 석굴암 보석을 모티프로 했다고 한다.
원래 석굴암은 동해바다를 바라보는 볼존불인 석가모니불의 이마인 인당에 천년의 빛(동방의
빛)이라고 지칭되는 보석이 세공되어 있어서 동해 일출이 떠오르면 빛이 이마에 닿아
보석이 빛나고 그빛으로 인해 석굴암 전체가 밝아지는 경이로움을 연출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유리관에 갇히고 벽에 갇혀서 그러한 장관을 볼수 없어서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석굴암입구인 종각이 있는 광장은 제야의 종소리와 동해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천년의 빛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런지....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십일면 관음보살상은 바로 본존 부처님의 뒷면 둥근 벽의 중앙을 차지하고 똑바로 서있다.
그 어느 조각보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석굴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존 부처님 바로 뒤에 배치된
이 조각의 양식적 특성은 무엇보다 머리위에 작은 아홉개의 얼굴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한 관음
이 있어서 본체와 합하여 십일면이 있는 관음 보살님이란 점이다. 긴 몸에 섬세하게 표현된
천의와 온몸을 덮고 흐르는 영락(纓珞)은 정교한 귀걸이나 목걸이 등과 더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
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에는 종열(從悅)이, 1758년(영조
34)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서 크게 중수되었으며 그뒤 일제강점기에 1913~15, 1917, 1920~23년 3차에 걸쳐 보수
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일제치하이던 1909년 가을 2대 통감이 된 소네아라스케가 초도순시라는 명목으로 경주 불국사로
해서 석굴암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후 석굴암 안에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소탑이 온데 간데 없이 증발했다.
1925년까지 10여년간 경주에 살면서 신라의 유적을 조사, 연구한 후 1929년에 '조선 경주의
밀수' 란 책을 낸 나카무라도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불타(석굴암의 본존상) 뒤의
9면(11면)관음 앞에 자그마하고 우수한 오층석탑이 안치돼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쓸쓸히 대석만 놓여져 있을 뿐이다. 풍문을 빌리면 모씨의 저택으로 운반되어
갔다는 것이다.“ 라는 글이 있는 걸로 보아 소네가 개인적으로 탐을 내었거나 아니면 어딘
가에 선물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빼돌렸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렇게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망국의 시절에는 선조들이 남긴 유산의 보수도 일본인들의
손에서 좌지우지 될 수밖에 없어서 제대로된 보수가 이루어 질수 없어서 석굴암의 부재가 석굴암
입구에 널려 있을 정도로 원형을 그대로 복원되지 못하였다.
1962~64년에 정부지원 아래 대대적으로 수리가 되었으나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문헌자료와 함께 중수과정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복원이 이루
어져 창건 당시의 석굴암 모습을 완전히 복원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석굴암이 예술적 종교적으로도 그 가치가 뛰어나지만 지하수를 이용하여 항온 항습을 조절하는
첨단 과학적인 설계로 1,000여년간 습기의 침탈을 받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힘든 건축기술은 세계에 자랑할 문화유산이라 아니 할수 없다.
국보 제24호로 지정된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최고의 문화유산중 하나로 인정받아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관련자료]
[경주맛집]
<금성관> 대게장순두부
경북 경주시 동천동 931-1 / 054-745-4371
<현대밀면> 밀면, 비빔밀면
경북 경주시 서부동 232번지 / 054-771-6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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