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불국사 1] 효성으로 지은 불국사에 깃든 비련의 전설 무영탑

경상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9. 2. 14. 18:25

본문

728x90

경주 토함산 자락에 자리한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된 불국사는 국보 20호 다보탑 등 7점의 국보 를 비롯한

 사적지내의 문화재들이 건축, 종교, 조각,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1995년

 12월 국보 제24호로 지정된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중 하나이다.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번지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 불국사 창건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

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

(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

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서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

(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1593년 5월 의병과 승군의 활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왜군의 방화와 파괴등으로 큰 피해

를 입어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불국사도 국가

의 지원 및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중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불국사 산문과 천왕문을 지나 완만한 길을 올라가면 제일먼저 보이는 건축물이 국보 제23호로 지정된 불국사

청운교백운교(佛國寺靑雲橋白雲橋)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일반사찰에서는 연못이나 개천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이르는 과정을 토함산자락에 자리잡은 불국사에서는 돌계단 밑에 수문을 만들어 형상화 한것이다.

 

청운교백운교는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아래로는 18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靑雲橋)

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보 제22호로 지정된 불국사연화교칠보교(佛國寺蓮華橋七寶橋)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

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국보 제20호로 지정된 불국사다보탑

(佛國寺多寶塔)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

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

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현재 다보탑은 2008년 12월부터 훼손이 심한 2층 사각난간과 팔각난간, 그리고 상륜부 부재들에 대한 부분

 해체 수리에 들어가서 1년동안  부재를 해체한 다음 방수처리를 하고, 균열과 박리(剝離.벗겨짐)가일어난

 부위는 접착, 강화처리를 한 후 부재 세척작업을 실시해 내기 위해서 보호막을 두루고 복원중에 있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에 있는 삼층석탑이 국보 제21호로지정된 불국사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으로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

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

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

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가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무영탑에 얽힌 전설은 현진건이 장편 역사 소설로 1928~1937년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옛날 백제에 이름이 뛰어난 석수인 아사달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아내 아사녀를 두고 불국사 3층

석탑을 만드는 불사를 맡아서 신라로 떠나게 되었다.

아사달이 고향을 떠난지도 어언 삼 년의 세월이 흘러 탑도 거의 완성되어 갔다. 그런데, 고향에 남아있던

 아사녀는 더 참고 기다릴 수 없어서 아사달을 찾아 서라벌로 왔다.

서라벌로 온 아사녀는 불국사입구에서 스님을 만나 아사달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불탑을 쌓는 사람은

속인과 만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스님의 말씀에 아사달을 만날 수가 없었다.

아사녀는 아사달이 탑을 완성하면 연못에 탑이 비칠거라는 스님의 얘기를 듣고 날마다 연못가에 나가서 탑

그림자가 비치기만을 기다렸다. 옛날 신라시대에는 불국사의 청운교 밑이 연못이었고 청운교 일부가 물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사녀는 영지로 가는 길에 탑이 완성되면 아사달을 따라 사비성으로 가겠다는

 동네 처녀의 말을 듣고, 아사달이 자기를 버린것이라 생각하여 오해를 하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아사녀는

 그만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드디어 탑이 완성되고 아사녀의 소식을 알게 된 아사달은 아사녀가 몸을 던진 연못에 나가 매일 울다가 아사녀

의 환영을 보게 되었다. 정신없이 다가가 보니 바위만 있었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정신없이 부처님을 조각하고 아사녀의 뒤를 따라 연못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 뒤로

석가탑의 그림자는 연못에 비치지 않게 되었다. 고 전한다.



[관련자료]

http://www.bulguksa.or.kr/

http://www.cha.go.kr/

http://enc.daum.net/

 


[경주맛집]

<금성관> 대게장순두부

         경북 경주시 동천동 931-1 / 054-745-4371


<현대밀면> 밀면, 비빔밀면

            경북 경주시 서부동 232번지 / 054-771-678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