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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운현궁에서 만난 활짝핀 매화꽃

서울시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9. 3. 1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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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를 부르는 봄비가 내리던 어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서 4번출구를나가 구한말 역사

의 중심에 서있었던 현장인 운현궁을다녀왔다.

지하철 4호선을 나서면 인사동 방향으로 내려가면 기나긴 행랑채 담벼락이 보도를 면하여 시장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이건물이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이다.

 

운현궁 매표소를 지나 운현궁을 돌아보다가 마주친것이 빗방울을 함초롬하니 머금고 있던 매화나무였다.

 

 운현궁 마당과 담벼락 사이에 심어져 있는 매화나무는 꽃망울이 이제 막터트리렸는 덧 매화꽃이 맺혀 있는

 가운데 몇몇 매화는 만개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듯 했으나 꽃샘추위를 비를 맞아 웬지 애처러워 보였다.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

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 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

(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였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종이 즉위(1863.12.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ㆍ증축 공사는 시작되었고,

 9개월만에(1864. 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의 준공을 보았다. 당시 대왕대비는 호조에 명하여 운현궁에

 매달 쌀 10섬과 100냥씩을 보내고, 운현궁의 신증축 비용으로 17,830냥을 지원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하였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자대

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의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

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

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치 밖에 안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웅변하고 있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왕후

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이다. 가례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가례행사를

위하여 1,641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준마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모두 운현궁을 거쳐갔다고 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를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노락당 못지 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등극했을 때 조종대신들이 왕의 심중을 헤아려서 왕실 예산으로 경근문과 공근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

고종은 호조판서 이돈영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운현궁은 특이한 형태의 통로가 있는데 건축물을 높게만들고 그중한채를 조금더 높이만들고 그아래로 출입

하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통로를 지나 뒷마당으로 나가면 석빙고 형태의 창고를 볼수가 있어서 운현궁의 위세와 운영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관련자료]

http://www.unhyungung.com/


[종로맛집]

<목포집> 떡갈비(20,000원), 홍어찜, 낙지탕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51번지 /  02-722-0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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