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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여행 금강변에 자리잡은 난계박연을 기리는 난계국악박물관과 국악의 거리

충청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9. 12. 17.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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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여행 금강변에 자리잡은 난계박연을 기리는 난계국악박물관과 국악의 거리

 

충북 영동하면 떠오르는 것은 굽이굽이 흘러가는 금강이 제일먼저 떠오른다. 전북 장수 뜬봉샘

에서 발원하여 힘차게 흘러가던 금강이 제법 강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는것이 바로 충북 영

동을 만나면서 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아름다운 금강변을 드라이브하다보면 어디선가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오는듯한 착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곳이 금강변에 자리잡은 국악의 거리이다.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신라의 우륵(于勒) 과 함께 우리나라 삼대악성 으로 불리는 난계박연

의 탄생지이자 생가터가 전해져 오는 곳이 금강이 굽이쳐 흘러가는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이다.

 

 

난계 박연 선생은 고려우왕 4년인 1378년 8월 20일 이곳에서 출생 태종5년(1405년)인 28세에

생원이 되었고, 34세(141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교리, 관습도관제조, 악학별좌, 대제학

 등을 역임후 세조 2년(1456년)에 삼남 계우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할뻔 하였으

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화를 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4년

(1458년)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어릴 때의 박연은 가야금을 매우 잘 타서 날아가는 새와 짐승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 와서 가야

금 연주에 맞추어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박연은 어릴 때부터 사람과 짐승의 마음을 하나로 통하게 하여 거의 신인(神人)에 가까웠으며

또 망고의 효자로 높았다.

 

 

박연의 어머니가 죽어서 심천면 마곡리에 묘를 쓰고 시묘(묘옆에 움막을 짓고 묘를 짓고 모시는

 일) 살이를 하던 때의 일이다. 소년 박연이 매일 밤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꼬박 밤을 새우다

시피 하자 시묘 첫 날밤부터 어디서 나타났는지 호랑이 한 마리가 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린

 박연과 묘를 지켜 주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도 또 그 다음 다음 날에도 호랑이는 걸르지 않고

 소년 효자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호랑이는 밤이 늦도록 묘 앞에 나타나지를 않았

다. 박연 소년은 은근히 호랑이의 안부가 궁금 하였다. 움막 옆에서 매일 밤 어린 효자를 지켜

주던 고마운 호랑이였으니 기다려 질 법도 하였다. 호랑이를 기다리기 위해 소년 박연은 새벽

녘까지 잠을 한 잠도 이루지 못했다. 소년 박연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밤마다 움막 옆에서

 묘와 박연을 지켜주다 그만 몸살이라도 난 것일까 도대체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주 어디 먼

 곳으로 떠나가 버린 건 아닌가 모를 일이었다.

잠을 설친 소년 박연은 거의 먼 동이 틀 무렵에서야 겨우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런데 소년 박연

이 막 잠이 들다 꿈속에 호랑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상주님‥ 상주님 제발 저를 살려 주옵소서

 저는 당제(지금의 길현리)에서 함정에 빠져 바로 죽게 되었습니다. 상주님‥‥」 소년 박연은

 꿈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연 꿈이었으나 소년은 도무지 호랑이의 애원이 꿈만 같지가 않았다.

 「호랑이가 함정에빠져 눈물로 호소해 왔는데 내가 이러고 있다니‥」 소년 박연은 어머니의

묘소를 떠나 당제 쪽으로 달렸다. 내를 건너고 언덕을 넘어 당제까지 달려갔을 때 거기에는 놀라

운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꺼내 놓고 삥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 박연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호랑이를 보았다. 틀림없이 어머니 묘소를 지켜주

던 호랑이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이미 숨이 진 뒤여서 박연이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소년 박연은 눈물을

흘리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호랑이를 돌려 줄 것을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은 박연의 효심과 짐승과의 인연을 귀하게 여겨 호랑이를 넘겨 주었다.

박연 죽은 호랑이를 어머니 묘소 밑으로 매고와 정성을 다해 묻어 주었다. 박연은 해마다 이 호

랑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주어 생시의 고마움을 추모하였는데 박씨 문중에서는 박연 어머니의

묘소에 제사를 지낼 때마다 반드시 호랑이 무덤에도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전해 온다.

 

 

난계박연선생의 탄생지로서 그 분의 얼을 기려 충북 영동을 국악의 본고장으로 가꾸어 모름

지기 국악 하면 난계를 떠올리고, 난계하면 영동을 떠올릴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난계사를

중심으로 난계묘소를 가꾸고, 난계생가를 복원하며, 국악박물관 건립. 국악기제작촌을 건립

하는 등 난계로 인해서 파생된 국악의 모든것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국악의 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난계국악 박물관에는 영상실, 국악의역사상 (국악의연표, 난계의 삶, 난계와 영동). 난계의 업

적, 한국인과 한국음악, 국악기의 이해, 국악기전시, 국악기체험장, 터치스크린 등이 설치되어

 있다.

 

전시국악기로는 가야금을 비롯한 현악기 14종, 타악기 37종, 관악기 19종 전시되어 있고,

난계 박연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비롯해 국악 연표, 연주모습, 국악기 제작과정 등 국악관련

 자료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어 교육의 장 활용되고 있다.

 

난계국악기제작촌은 영동군과 국악기 제작 전문업체와 협약을 통하여 국악기를 생산 판매함으

로써 국악의 발전과 국악기제작 계승, 보존하여 국악의 고장, '영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상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난계박연선생의 탄생지로서 그 분의 얼을 기리고 음악적 업적과 예술적 혼을 계승 발전 시키고

 국악기제작을 통하여 국악의 발전과 국악기제작 계승, 보존 및 국악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더 나아가 국악기제작 체험과 관광상품을 제작판매하여 경영수익에도 이바

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가야금, 법금, 거문고, 아쟁, 대아쟁, 해금, 양금, 개량해금, 개량아쟁, 개량가야

금(18현, 22현, 25현)등 특별주문악기등의 현악기를 제작하고 있으며 장구, 북, 소고, 특수북

 등의 타악기와 대금, 중금, 소금 단소 등의 관악기를 제작하고 있다.

 

이외에도 전시악기 4종(가야금, 법금, 거문고, 아쟁), 소품으로 악기모형(열쇠고리, 장신구,

트로피, 저금통) 20종 제작을 하고 있다.

 

난계국악박물관 대각선편에 자리잡은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은 2006년 3월 15일 문을 연 지상

 3층·지하 1층 건물로, 국악의 고장을 표방하는 영동군이 국악의 거리에 세운 일련의 국악관련

 시설 중 하나로 체험관·공연장·체험전수실·개인연습실·영상세미나실·등에서 국악기체험

및 국악교육을 할수 있는 시설이다.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에는 가야금·거문고·해금·대금·피리·편종·편경·단소 등 8가지 국

악기 소리를 터치스크린을 통해 동영상을 보며 들을 수 있는 체험관, 136석의 소공연장, 각종

 악기를 직접 연주해볼 수 있는 체험전수실 등이 있다. 숙박을 하며 국악공부를 하는 국악연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국악(國樂)은 ‘우리나라의 음악’이란 뜻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역사를 국사(國史)라 하고,

우리나라 말을 국어(國語)라 하는 것과 같다.  

국악이 ‘우리나라의 음악’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중종

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나타난 ‘국악’이란 용어는 모두 외국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음악

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국악이란 말은 그것이 사용된 초기의 의미도 오늘날과 같이

외래음악 또는 외국의 국악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로 우리나라의 음악을 가리킨 것이었다.

 

국권과 함께 빼앗겼던 용어 ‘국악’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과 함께 되찾아졌다.

함화진(咸和鎭) 등이 창립한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이란 음악인들의 모임에서 이를 공식적인

단체의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우리 음악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우리 음악을 지칭하는 용어는 여전히 조선음악과 국악이 혼용되었으니, 성경린(成慶麟)이 지은

《조선음악 독본》이란 책이름이나, 역시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한국국악학회’와 같은

 학술단체의 이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국악’이란 말은 결국 1951년 국립국악원이 개원

하면서 정부기관의 명칭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국악은 ‘한국음악’의 약칭으로 외래음악인 서양음악이나 외국 풍의 대중음악과 구별

되는 우리의 전통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어, 그 말이 처음 사용되던 조선시대의

개념과 그 함의를 같이하고 있다.

 

 

국악의 거리를 조성된 인근인 금강변인 이원면과 영동군 심천면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월이산

(651m)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에 옥계폭포가 자리잡고 있다.

옥계폭포는 월이산 계곡을 흘러내리던 맑은 계곡물이 산자락 아래부분에서 20여m 절벽을 만나

 폭포로 떨어지면서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옥계폭포는 예부터 난계 박연 선생이 세조4년(1458년)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까지

옥계폭포에 들려 대금과 가야금을 연주하며 말년을 보냈는데 박연이 가야금이나 대금을 연주하

면 매우 잘 타서 날아가는 새와 짐승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 와서 연주에 맞추어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와 이곳을 박연폭포라고도 부른다.

 

 

 

[관련자료]

영동군청 : http://www.yd21.go.kr/

난계국악기제작촌 : http://www.nangyekuka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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