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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맞아 예수의 고난을 되새겨볼수 있는 아산 공세리 성당과 설경

충청도 여행지

by 마패여행 2009. 12. 2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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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을 맞아 예수의 고난을 되새겨볼수 있는 아산 공세리성당과 설경

                                     

함박눈이 며칠동안 내리던 12월 셋째주 일요일에 아산만을 바라보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공세리성당의 성당과 느티나무를 감싸고 있을 설경을 보기 위하여 39번국도를 달려갔다. 

  

처음 집에서 출발할때는 눈이 그쳐 있어서 푸른하늘과 어울어지는 공세리 성당의 그림같은

겨울풍경을 볼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차가 아산시를 접어들 무렵부터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해서 중간에 돌아갈 때 망설이다가 이왕 내친걸음 쏟아지는 눈이라도 찍자는 생각에 그

대로 직진했다.

 

 

공세리성당에는 본당과 박물관, 사제관, 피정의 집, 회합실 등이 있으며 수백년 된 느티나무와

 각종 수림으로 쌓여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천주교성지다.

 

공세리 성당에 도착해서 입구에 서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카메라들 들고

 입구를 올라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눈을 맞으면서 성당을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 보니 눈발이 멎으면서 맑은 하늘을 볼수

있어서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공세리 성당을 돌아 볼수 있었다.

 

 

봄과 가을에도 이곳을 종종 찾아 보곤 했지만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주말에 이곳을 찾

아 공세리 성당 주변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을 돌아보니 또다른 분위기의 느낌을 가질수 있었다.

 

십자가의 길에 조성된 예수가 십자가를 들고 가는 동상과 이를 바라보는 마리아 머리위로 하얀

 눈이 소복히 쌓여 있어 예수의 고난과 삶 그리고 성탄절이 한눈에 들어오는 묘한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공세리 성당은 아산만과 삽교천을 잇는 인주면 공세리 언덕 위에 세워진 천주교 대전교구 소속

의 본당으로 초기 선교사들이 포구에 상륙하여 전교를 시작한 곳으로 1894년에 교회가 설립

되었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는 이곳에 112년전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드비즈신부님이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햐여 이곳을 찾아 온 이유는 그당시에는 이곳이 아산만과 삽교천이 만나

는 곳으로 내포지방의 입구로 해상과 육로로 연결되는 중요한 포구와 공세 창고가 자리잡고 있

었기 때문이다.

 

 

신부님들이 이고장에 처음 들어 왔을때는 동네 가운데 민가를 교회로 사용했으나 1897년에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4-1번지에 400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오던 세곡창고터를 헐고 사제관

을 세우고 본당은 1922년에 완공되어 충청남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공주 본당,

안성, 온양, 둔포 본당이 분할되었다.

 

 

드비즈신부는 이곳에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드비즈 신부가 서

양의술과 한방기법을 활용하여 개발한‘성일론고약’을 이명래(요한)에게 비법을 전수하여 한때

 만병치료약처럼 사용되었던 이명래 고약이 탄생한것은 유명한 일화중의 하나이다.

 

 

경내에는 병인 박해 때 수원, 서울, 공주 등에서 고문을 당하고 옥사하거나 교수형에 처해진

 28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야외 제대형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공세리 성당의 역사와 천주교

의 험난했던 역사의 한자락을 접할수 있다.

 

공세리 성당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나무는 1680년경 심어져 329년의 수령을 헤아리는 느

티나무로 나무 높이가 31m이고 둘레는 5.5m로 아산시 보호수로 지정될 정도로 오랜세월 이 자리

를 지켜온 나무이다.

인조 9년(1631년) 당시 세곡을 상 하역 하는 항구 근처에 사람들의 휴식처를 조성하면서 성곽옆

에 많은 나무를 심었는데 이나무는 그중 하나이다.

고종 31년(1894년)에 공세리 성당을 건축하면서 성곽으로부터 3m 아래인 현위치로 옮겨져 역사의

 현장으로 말없이 바라보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증인이다.

 

 

이곳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하여 청주. 옥천등 39개 고을의 조세를 조운

선을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공세곶고지가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곡식을 운반하기 전

에 쌓아두던 창고의 하나로 ‘공진창’이 처음 명칭이다.  

 

 

성종 9년(1478) 『경국대전』에 의하여 모든 제도가 정비되면서 충청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

식은 모두 이곳으로 모았다가 일정한 시기에 서울의 창고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창고터

 주변에 만든 성지(城地)가 약 680m 정도 남아 있는데, 겨우 터만을 알아 볼 정도이다.처음에는

 창고가 없어 한데 쌓아 두었으나, 중종 18년(1523)에 비로소 창고 80칸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충청도 지방 39개 목·군·현의 조세로 바친 쌀을 모아 두고 조운선 15척으로 서해

500리 물길을 이용 한양으로 운반하던 항구가 있어 많은 사람들과 물자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관련자료]

http://www.asan.go.kr/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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